산맥의 등뼈를 이루는 거대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은, 언제나 안개와 구름에 가려 신비로운 자태를 뽐냈다. 그러나 오늘, 수십 년 만에 찾아온 마른하늘은 봉우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깎아지른 절벽, 검게 변색된 암석들, 그리고 그 위를 덮은 기괴한 형상의 나무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앙상한 갈비뼈처럼 솟아오른 봉우리들 중 가장 높은 곳, ‘천암봉(天岩峰)’이라 불리는 곳에 오늘의 비극이 시작될 터였다.
청운검 서린은 낡은 도포자락을 여미며 천암봉의 비좁은 정상에 발을 디뎠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돌의 한기는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봉인된 저주, 혹은 잊힌 재앙의 잔재가 스며 있는 듯했다. 하늘은 검붉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으나, 그 색은 아름답기보다는 피의 웅덩이를 연상시켰다. 먹구름 한 점 없는 창공에 드문드문 박힌 별들은 마치 핏물에 잠긴 눈동자처럼 낯선 빛을 발했다.
정상에는 이미 수십 명의 무림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각 문파의 장문인, 명망 높은 세가의 가주, 혹은 강호에 이름을 떨친 독문 기예의 대가들. 그들은 평소라면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불꽃을 튀겼을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얼굴에는 경외감과 함께 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이곳에 온 이는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이끌려,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이 기괴한 연무대 위에 선 것이다.
“하…… 정말 끝까지 이런 식으로군.”
낮게 읊조린 서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동해를 호령하는 해풍문의 문주, 백호검 남궁세가주, 그리고…… 저기, 한때는 정의를 외쳤으나 지금은 탐욕에 물든 검은 독사, 혈마교의 교주 역천명도 보였다. 역천명의 눈은 뱀처럼 번들거렸고, 그 시선이 서린에게 닿자 싸늘한 기운이 번개처럼 오갔다.
“청운검. 네놈이 이런 자리에 발을 들이다니, 세상도 다 됐군.”
역천명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는 비명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내 의지로 왔지만, 너는 끌려왔겠지, 역천명.”
서린의 대꾸는 간결했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역천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천암봉 정상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거대한 제단 위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은 도포를 두른 한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얼굴을 깊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고, 그의 발은 땅에 닿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었다. 그의 출현에 정상에 모인 모든 고수들이 경악에 찬 신음을 흘렸다.
“천암봉에 모인 무림의 영웅들이여.”
남자의 목소리는 늙고 건조했으며, 마치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모든 감정을 깎아낸 듯했다. 하지만 그 울림은 천암봉 전체를 뒤흔들 만큼 강렬했다. 무림 고수들의 내공이 강제적으로 제압당하는 듯한 억압감이 모두를 짓눌렀다.
“그대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천 년 만에 열리는 이 ‘명천대회(冥天大會)’의 의미를.”
명천대회. 암흑의 하늘 아래 열리는 대회. 전설로만 전해지던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고수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렸다. 이 대회는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었다. 이 대회는…… 재앙 그 자체를 의미했다.
“세상이 기울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세의 장막이 찢어지고, 보이지 않던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밤마다 꾸는 악몽, 저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울부짖음, 병들어 죽어가는 대지, 붉게 물든 하늘…… 모두가 그 징조다.”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신탁처럼 엄숙했다. 서린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그의 내공이 아무리 깊어도, 그의 검술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한낱 불씨에 불과했다.
“그 어둠은 이름도 형태도 없다. 오직 세상의 ‘기(氣)’를 집어삼키며, 모든 생명을 소멸시키는 존재. 우리는 그것을 ‘흑암(黑暗)’이라 부른다.”
흑암. 그 단어가 입에서 터져 나오자, 천암봉 정상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고수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몇몇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 명천대회는, 흑암에 맞설 단 한 명의 ‘구원자’를 선택하기 위한 의식이다.”
구원자? 남자의 말에 술렁이던 무림인들의 시선이 서린에게로, 혹은 역천명에게로, 혹은 다른 내로라하는 강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대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승자에게는 흑암을 대적할 ‘고대 비보(古代秘寶)’가 주어질 것이며, 그의 이름은 천하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패자는……”
남자는 말을 잠시 멈췄다. 그의 깊은 두건 속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패자는, 그들의 모든 기와 영혼을 흑암에게 바쳐, 구원자의 힘이 될 것이다.”
그 말에 모든 고수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제물이 된다는 것. 그들의 목숨이, 그들의 무공이, 그들의 영혼이, 이 기괴한 의식의 연료가 될 것이라는 섬뜩한 선고였다. 순간, 정상에 모인 모든 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몇몇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발밑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촉수가 그들의 발목을 굳건히 붙잡았다.
“도망칠 길은 없다. 이 천암봉에 발을 들인 순간, 그대들은 이미 이 의식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제, 명천대회를 시작한다.”
남자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천암봉 정상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더욱 강렬해지더니, 주변의 검은 암석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심연보다 더 깊은 어둠이 기어 올라왔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남자의 왼편에 서 있던 그림자 촉수 하나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그 끝에서 거대한 칼날이 돋아났다. 칼날은 마치 살아있는 피처럼 붉게 빛났고, 그 칼날이 향한 곳은…… 청운검 서린의 옆에 서 있던, 해풍문의 문주였다.
“첫 번째 대진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해풍문 문주, 진광진.”
진광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칼날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망치려 했으나, 발목을 잡고 있는 그림자 촉수는 더욱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칼날은 망설임 없이 그의 심장을 향해 맹렬하게 내려찍혔다.
콰앙!
섬광과 함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진광진의 육신이 산산조각 났다. 그의 피와 살, 그리고 그가 평생 수련했던 내공의 기운이, 검은 칼날에 흡수되는 듯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붉은 칼날은 더욱 선명한 피색으로 빛났다.
모든 무림 고수들은 얼어붙은 듯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한때 강호를 호령했던 무림의 거목이, 고작 시작과 동시에 이리 허무하게 스러지다니. 모두의 얼굴에 극도의 공포와 함께 생존 본능이 맹렬히 타올랐다.
서린은 검지를 들어 검집에 박힌 청운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쓸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그의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 대회는 단순한 승패를 가리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붉게 빛나는 칼날이 천암봉 정상 중앙에 박혔다. 그리고 그 옆으로, 또 다른 그림자 촉수가 솟아오르며 다음 대진의 대상을 지목했다.
천암봉의 어둠이, 이제 막 개막을 알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