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망각의 이름으로
고요한 밤공기가 도시를 감쌌다. 30층 높이의 오피스텔 창가에 기댄 남자는, 맞은편 빌딩의 화려한 불빛을 마치 사냥감을 관찰하듯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눈빛은 차갑고 예리한 강철 같았다. 윤재하. 그 이름은 이제 그에게 있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5년간, 그는 철저히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으니까.
맞은편 빌딩의 최상층. 그곳은 강서준의 집무실이었다. 불빛 아래, 서준은 여전히 세상의 모든 영광을 독차지한 듯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서준의 모습은 재하의 심장을 찢어 발기던 과거의 기억과 완벽하게 겹쳐졌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대가치고는, 너무나 평화로운 삶이군, 강서준.*
재하의 입술에 한 줄기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손에 든 태블릿 화면에는 서준의 회사 내부망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었다. 보안팀이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맹점은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재하는 그 맹점을 찾아내고 파고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밤, 재하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정교하게 짜인 알고리즘은 서준의 회사가 추진하는 신규 프로젝트의 핵심 데이터베이스에 스며들었다. 파괴가 목적이 아니었다. 혼란. 그것이 재하가 원하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 작은 모래알 하나가 거대한 수차를 멈추게 하듯, 미세한 오류가 거대한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서준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재하는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단지 메마른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처럼 차가울 뿐이었다.
***
강서준은 늦은 밤까지 술에 취해 있었다. 고급 위스키의 향이 집무실 안에 가득했다. 최근 성공적인 투자 유치 덕분에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상태였다. 이제 경쟁사는 그의 발밑에 무릎 꿇는 일만 남았다. 그는 제국의 황제였다. 완벽하고 무결한 제국.
그때, 책상 위 모니터에서 작게 알림음이 울렸다. 서준은 귀찮은 듯 눈을 찌푸렸다. “아, 또 뭐야.”
그는 비틀거리며 모니터 앞에 앉았다. 프로젝트 총괄 이사에게서 온 긴급 보고 메일이었다. ‘신규 프로젝트 데이터 일부 손실 추정. 현재 원인 파악 중.’
서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데이터 손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회사는 업계 최고의 보안 시스템을 자랑했다. 게다가 겨우 ‘일부’ 손실? 그 정도로는 프로젝트에 큰 지장이 없을 터였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며 메일을 닫았다.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불길한 예감 때문인지, 등줄기에 묘한 한기가 스쳤다. 하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마. 누가 감히 그의 성역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한낱 시스템 오류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위스키 잔을 채웠다. 하지만 방금 전의 찜찜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괜히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휘감는 듯했다.
***
새벽 3시. 재하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강서준의 집무실에 박혀 있었다. 서준의 불이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제법 신경 쓰이게 만든 모양이었다.
*두려움은 불확실성에서 시작되지.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침식은,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5년 전, 그 지옥 같던 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믿었던 친구의 칼날이 등짝에 꽂히던 그 순간의 배신감. 모두가 그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때, 서준은 뒤에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모든 것을 가로챘다. 그의 명예, 그의 미래, 그리고… 그의 삶.
재하의 손에 들린 태블릿에서 푸른빛이 깜빡였다. 시스템에 침투한 그의 흔적은 완벽하게 지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 밤은, 그저 작은 인사치레였다, 강서준.”
재하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그의 낮은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네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는 한, 너는 결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그리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처럼. 강서준은 아직 알지 못했다. 지금 그의 제국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단순한 시스템 오류가 아닌, 5년 전 죽었던 친구의 차가운 망령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망령이 들고 있는 칼날은, 이제 막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