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거대한 은행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도서관의 낡은 유리창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리창 너머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오래된 건물의 심장 소리처럼 낮고 불길하게 울렸다. 지은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자정.
특수 자료실의 곰팡내와 종이 먼지 냄새는 그녀에게 이제 익숙한 공기였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이 낡은 책들 사이를 헤매는 것이 지은의 일과였다. 오늘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수백 년 전 쓰인 고문서들을 디지털화하기 위해 분류하는 일이었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그녀의 손은 조심스럽게 마른 종이들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마치 깨어날까 두려워 숨죽이는 잠자는 거인을 다루듯.
“하아….”
지은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게 폈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창고 안은 스산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분명 난방은 되고 있을 텐데,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이곳은 늘 그랬다. 시간과 공간마저 잊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공간. 하지만 오늘 밤은 유독 더 그랬다. 왠지 모르게 피부가 따끔거리고, 누군가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그때였다.
선반 저편, 등잔도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주 미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지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쥐일까? 아니면 낡은 건물이 내는 소리?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사각.’ 이번에는 좀 더 가깝게, 그리고 좀 더 선명하게. 마치 부드러운 천이 마찰하는 듯한 소리였다.
“누구세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지나치게 작고 떨렸다. 정적만이 대답했다.
지은은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여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마룻바닥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삐걱거렸다. 복도 끝, 가장 오래된 책들이 모여 있는 곳. ‘고대 금서’라고 팻말이 붙어 있는 선반 앞이었다.
그녀의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책장 사이를 비췄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 그 사이에 서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지은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 걸린 소리는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선반 앞에서 서 있던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었다. 너무나도 고요하게. 마치 그림자처럼.
“…누구세요?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지은은 용기를 쥐어짜내 말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과 지은의 손전등 불빛이 섞여 그의 얼굴을 비췄다.
순간, 지은은 숨을 멎었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얼굴. 날렵한 콧대, 섬세하게 조각된 턱선, 그리고 이마를 살짝 덮은 흑단 같은 머리카락. 무엇보다도 그녀를 압도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한 검고 투명한 눈동자. 그 눈빛은 그녀를 꿰뚫는 듯했고, 동시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알 수 없는 슬픔과 권태를 담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은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정지된 시선은 마치 시간을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은은 어색하게 침을 삼켰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이상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흙냄새 같기도, 숲의 새벽 공기 같기도 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동시에 섬뜩하게 매혹적인.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지은은 간신히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깊었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혹은 땅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물소리처럼.
“이곳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은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보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책장 중간에 꽂힌 한 권의 책을 가리켰다.
낡고 바랜 가죽 표지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책. 지은은 저런 책이 저기에 있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곳의 모든 책을 외울 지경이었으니까.
“이 책은… 저의 것이다.”
그의 말에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책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러나 닿기 직전,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게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경고와도 같은.
“이곳에… 왜 계신가요?” 지은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거두었다.
남자는 이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그 책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닿을 수 없는 갈증과 오래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
“무엇을요?”
그는 다시 지은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 목덜미, 그리고 가슴께로 아주 느리게 내려왔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는 듯했다. 지은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잃어버린 것을… 혹은 잊힌 것을.”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그는 이제 지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그녀는 그의 차가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흙과 숲의 새벽 향이 더욱 짙게 풍겼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공포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일까.
“당신은… 인간인가?”
그의 질문은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 그 책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마치 흰 뼈로 만들어진 듯 창백하고 길었다.
“이 책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책 표면을 스치자, 낡은 가죽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지은은 보았다. 책의 문양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 듯했다.
“나와… 같은 이가 쓴 것이니.”
같은 이? 지은의 머릿속에 혼란이 휘몰아쳤다. 그가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저 책은 또 무엇이며? 그녀의 불안은 극에 달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혹에 사로잡혔다. 마치 깊은 숲 속, 길을 잃은 사슴이 홀린 듯 맹독을 품은 아름다운 꽃에 이끌리는 것처럼.
그때, 저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원이 순찰을 도는 소리였다.
남자의 눈이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향이 갑자기 짙어지더니, 곧바로 연기처럼 흩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간이… 다 되었군.”
그의 목소리는 이제 훨씬 더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마치 물에 잉크가 번지듯, 어둠 속으로 스르르 녹아들었다. 지은은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이 닿은 곳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경비원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이내 특수 자료실 입구에서 멈췄다.
“지은 씨, 아직 안 가셨어요? 문 잠궈야 하는데.”
“아… 네, 이제 가려고요.” 지은은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녀는 손전등을 들어 아까 그 남자가 가리켰던 선반을 비췄다.
책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고, 귓가에는 그의 깊고 낮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나와… 같은 이가 쓴 것이니.’
‘당신은… 인간인가?’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가 말한 ‘같은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몸을 떨었다.
그의 눈빛이, 목소리가, 그리고 그 차가운 향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잊혀야 할 존재가, 잊힐 수 없는 형태로 그녀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그 밤부터 지은은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끌림인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