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는 먼지 낀 별들만이 무심히 박혀 있었다. 이곳, 이름 없는 변방의 ‘솔그늘’ 마을에는 달빛조차 사치였다. 지혁은 흙먼지 덮인 맨손으로 거친 괭이 자루를 움켜쥐고 밭고랑을 정리했다. 그의 땀방울이 말라붙은 흙에 스며들었지만, 밭은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작년의 흉작에 이어 올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뼛속까지 시렸다.
‘젠장, 전생엔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하던 내가….’
지혁은 쓰게 웃었다. 20대 후반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을 때, 갓난아기의 몸으로 이세계에 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지만, 생존 본능은 경이로울 정도로 강했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자랐고, 이 세계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며 서서히 분노를 키웠다.
이곳은 아크론 제국.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그 영광은 오직 황도와 귀족들에게만 해당될 뿐, 변방의 백성들에게는 끝없는 수탈과 억압의 굴레였다. 솔그늘 마을은 제국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곳으로, 제국의 눈길조차 닿지 않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가장 혹독한 착취의 대상이었다. 매년 거둬가는 막대한 세금과 강제 부역, 때로는 강제 징집까지. 이곳 사람들은 단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
어린 시절, 그는 황도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다. 전생의 지식으로 이 세계의 과학 기술이나 문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깨달았다. 제국은 개개인의 삶이나 혁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더 많은 것을 빼앗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그의 전생 지식은 그저 희미한 환상에 불과했다.
저 멀리, 마을의 낡은 회관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내일 있을 세금 독촉에 대해 논의하는 중일 것이다. 논의라고 해봐야 별다른 수가 있으랴. 그저 한숨과 절망뿐일 터.
“지혁아, 이제 그만 쉬어라. 해 진 지 오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혁은 괭이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진 솔그늘 마을의 풍경은 지독히도 평화로웠지만, 그 평화는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허상에 불과했다.
다음 날 아침, 마을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침내,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차 행렬이 보였다. 제국의 징세관(徵稅官)들이었다.
“젠장, 또 왔어!”
누군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치마폭 뒤로 숨고, 어른들은 굳은 표정으로 마차를 주시했다. 마차는 마을 회관 앞에 멈춰 섰고, 화려하지만 위압적인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내렸다. 그들의 허리에는 언제든 휘두를 준비가 된 칼이 차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징세관 카론이었다. 굶주린 늑대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비웃는 듯 비틀린 입매는 그를 보는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늘 솔그늘 마을의 고통을 즐기는 듯했다.
“솔그늘 마을 촌장 나오너라!”
카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늙은 촌장이 비척이며 앞으로 나섰다. 촌장의 등은 이미 굽을 대로 굽어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 대신 세월의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징세관님, 어서 오십시오. 또 무슨 용무로….”
“무슨 용무는 무슨 용무인가! 당연히 밀린 세금 때문이지! 겨울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야? 황제 폐하의 자비는 무한하나, 너희 같은 버러지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 법! 당장 내놓으시오!”
카론은 촌장의 말을 자르고 윽박질렀다. 그의 눈은 마을 사람들을 훑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징세관님, 작년 흉작에 이어 올해도 농사가 영 시원찮아… 밀알조차 제대로 여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지난달에는 징집령까지 내려서 젊은이들마저 다 끌려가 버리고… 정말이지 남은 곡식이라곤 겨울을 날 최소한의 양뿐입니다. 제발, 제발 자비를….”
촌장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혁은 그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봤다. 늘 똑같은 풍경, 늘 똑같은 절망이었다.
“자비? 버러지 주제에 자비를 논해? 닥쳐라, 늙은이!”
카론은 촌장을 발로 찼다. 늙은 촌장은 고통에 신음하며 흙바닥에 쓰러졌다. 카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짓했다.
“내 눈에 네놈들의 배가 고파 보이는가? 아직도 살집이 붙어 있지 않나! 그리고 지난주에 황도에서 긴급 조치령이 내려왔다. 제국의 북부 국경 수비대가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남자라면 나이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갈 것이다. 군량미가 부족하다니, 곡식도 남김없이 가져갈 테고!”
카론의 말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로 질렸다. 남은 남자들은 모두 끌려갈 것이고, 겨울 양식마저 빼앗기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아니면 제국의 총알받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거나.
한 젊은 여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안 돼요! 제 남편은 지난번에 끌려갔어요! 아이들만 남았는데, 제발, 제발 저희 겨울 양식만은…!”
“시끄럽다!”
카론의 부하 중 하나가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심장이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뜨거워졌다. 전생의 기억 속,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단 한 번의 항거도 허락되지 않았던 잔혹한 현실이 겹쳐졌다.
‘이대로는 안 돼. 전생에도 이랬고, 이곳에서도 똑같아. 아무리 외치고 빌어도, 저들은 듣지 않아. 아니, 듣고 싶지 않은 거야.’
지혁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한 명의 마른 청년이 무기력하게 걸어 나올 뿐이었다. 그는 쓰러진 촌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부축했다.
“촌장님, 괜찮으십니까?”
“지혁아….” 촌장은 지혁의 손을 잡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제, 끝났어….”
지혁은 촌장을 일으켜 세우며 마을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체념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징세관 카론을 똑바로 응시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지혁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불안한 정적 속에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과 징세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카론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 버러지 같은 놈은 또 누구지? 네놈이 뭘 안 된다는 거야?”
지혁은 카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직 마을 사람들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수백 년간 그래왔듯이 계속해서 빼앗기고, 굴종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곡식을 빼앗기고, 자식들을 빼앗기고, 그리고 마침내 목숨까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저들은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지혁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지혁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빼앗길 것이라곤 이제 우리의 목숨뿐입니다. 그런데, 이 목숨, 저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는 것보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서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카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부하들이 칼집에 손을 얹었다.
“이 미친놈이 감히 황제 폐하의 징세관 앞에서 반역을 논하는 것이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라!”
카론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부하 두 명이 지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저들을 보세요. 저들은 우리가 두려워서 칼을 빼듭니다. 저들은 우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마음껏 우리를 짓밟는 것입니다!”
지혁의 말은 마치 마른 장작에 던져진 불씨 같았다. 마을 사람들의 굳어 있던 눈빛에 희미한 불꽃이 일렁였다. 공포는 여전했지만, 그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분노와 체념이 뒤섞여 새로운 감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는… 죽는 것보다 더한 지옥에서 살게 될 겁니다. 이젠,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더 이상 저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정할 때가 왔습니다!”
지혁에게 달려들던 두 명의 징세관이 잠시 멈칫했다. 그들의 눈에 담긴 것은 더 이상 나약한 농민이 아니었다. 비록 마른 몸이지만, 그 눈빛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작지만 뜨거운 희망의 불꽃이었다.
징세관 카론은 이를 갈았다. “이런 오만한 놈! 네놈을 죽여서 본보기로 삼아주마!”
그가 직접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햇빛에 번뜩였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지혁은 카론의 칼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는 그저 마을 사람들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곳 솔그늘 마을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제국의 억압에 맞서는, 작지만 거대한 반란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