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 빈틈

서연은 새 아파트를 사랑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제 힘으로 마련한 온전한 첫 보금자리였다. 층수는 28층,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회색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그림처럼 놓였다.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 있었지만, 이곳만은 완벽하게 격리된 그녀만의 성채 같았다. 미니멀리스트 취향을 반영한 가구들은 정갈하게 자리 잡았고, 햇살은 매일 아침 거실을 가득 채웠다. 밤이 되면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반짝여 마치 거대한 별자리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완벽했다. 정말로.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착각하는 줄 알았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분명히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 충전기가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었다. ‘내가 여기다 뒀던가?’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식탁이 맞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워낙 건망증이 심한 편이니까.

며칠 뒤에는 화장실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출근 전 샴푸를 하려는데, 분명 어제 밤에 다 쓴 샴푸통이 새것처럼 묵직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뚜껑이 열려 있었다. “어제 새로 뜯었었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갸우뚱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욕실 바닥을 살폈지만 물기는 전혀 없었다. 새 샴푸통이 저절로 뚜껑을 열고 나타났을 리는 없고. 그저 어젯밤 몽롱한 상태로 씻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머리를 감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난방은 분명 틀어두었는데, 방 안 공기가 마치 한겨울처럼 싸늘했다. 눈을 뜨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스탠드 조명이었다. 서연은 잠시 숨을 멈췄다. 분명히 자기 전에 모든 불을 껐었다.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에 도중에 깨서 불을 켤 이유가 없었다.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스탠드 조명만이 쓸쓸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제야 서연은 깨달았다. 조명 아래,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아끼는 도자기 컵이 깨진 채로 흩어져 있었다. 조각들은 마치 퍼즐처럼 완벽하게 원형을 이루며 테이블 한가운데 모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심스럽게 깨뜨린 후 놓아둔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도둑? 그러나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침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둑이라면 물건을 훔쳐야지, 컵을 깨뜨려 모아놓을 리가 없었다. 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컵 조각들을 치우는 내내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 후로 기이한 일들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대담해졌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려 있었다거나, 욕실 거울에 희미한 손자국이 찍혀 있다거나, 밤마다 어딘가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쥐인가, 아랫집 소음인가, 윗집에서 가구를 끄는 소리인가 별별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소리의 근원지는 항상 알 수 없었고, 소음은 마치 집 안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서연은 수면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어둠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벽지 속 무늬가 기괴한 형상으로 바뀌는 착시현상까지 겪었다.

“요즘 좀 피곤해 보여, 서연아. 무슨 일 있어?” 직장 동료 미나 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서연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좀 잠을 설쳐서요.”
“이사 스트레스인가? 새 집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이사 스트레스라니… 내가 살고 있는 건 새 집이야.’ 서연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차마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이성적인 미나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어느 날 저녁, 서연은 퇴근 후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지친 몸을 감싸자 겨우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을 감고 편안함을 만끽하려는 찰나, 찰랑거리는 물소리 위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서… 연… 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욕실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고,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연은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환청이 아니었다.

— 너… 혼자… 가… 아니야…

목소리는 눅눅하고 서늘했다. 마치 오래된 습한 벽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음성이었다. 서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욕조 밖으로 뛰쳐나왔다. 물에 젖은 몸을 덜덜 떨면서 수건으로 감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소름이 돋아 피부가 따끔거렸다. 서둘러 옷을 입고 욕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데, 복도 끝에 있는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 모습 뒤로, 희미하게, 검은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서연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는 형체가 없었지만, 분명히 그녀의 뒤에 있었다. 어렴풋이 사람의 형상 같기도 했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그림자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거울 속에도, 복도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서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공포가 그녀를 완전히 잠식했다.

그날 밤 이후, 서연은 아파트에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친구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친구는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걱정했고, 서연은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믿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친구는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나 명확한 해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저 ‘너무 힘들면 잠시 떠나 있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자신의 아파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힘들게 마련한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도대체 무엇이 이 아파트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아파트로 돌아온 첫날 밤, 서연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거실에 앉아 밤새도록 집안을 감시했다. 자정을 넘기자,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천천히, 조명은 꺼졌다.
어둠이 짙게 깔렸다. 멀리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그 순간, 부엌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꽉 움켜쥐었다.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마시고 남은 와인잔이 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유리 조각들이 또다시 원형으로 모여 있었다. 서연은 깨달았다. 이건 도둑이 아니었다. 도둑은 저렇게 섬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물건을 부수지 않았다. 이건… 유희였다. 그녀를 가지고 노는 장난이었다.

“나와!” 서연은 소리쳤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누군데! 왜 이러는 거야!”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갑자기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누군가 등 뒤에 바싹 붙어 선 듯했다. 서연은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알려줘…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 순간,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쾅!’ 하고 떨어졌다. 액자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 너머로, 하얀 벽지에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네가… 나를… 불렀잖아…”**

글씨는 서연의 손글씨와 똑같았다. 아니, 그녀가 필사적으로 썼던 어떤 낙서 같기도 했다. 서연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 언제 자신이 이 존재를 불렀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아파트 현관문이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 씨?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이웃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려서요…”

서연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문 밖에는 사람이 있었다. 현실이었다. 하지만 벽에 쓰인 글씨는 너무나 선명했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이웃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연 씨! 얼굴이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아주머니의 눈빛이 서연의 뒤편, 거실 벽을 향했다. 서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벽은 깨끗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떨어진 액자만이 흉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웃 아주머니의 눈에 비친 자신은, 그저 밤새도록 공포에 질려 잠도 못 자고 헛것을 본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아직 이 아파트에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안에 들어와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머니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할 때, 서연은 아주 희미하게,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저를… 불렀다고요…?”

이웃 아주머니는 서연의 알 수 없는 혼잣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아파트 복도에는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아주 가깝게 들리는, 어떤 속삭임이 서연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 자신의 목소리처럼.

—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야… 영원히…

서연의 눈에 텅 빈 허무함이 번졌다. 완벽했던 그녀의 성채는 이제 완벽한 감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감옥의 간수는… 자신이었다. 혹은… 그녀가 불렀다고 하는 그 존재였다. 혹은… 그 둘 모두였다. 완벽했던 아파트의 ‘빈틈’은 그렇게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