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어둠 속의 빛, 첫 번째 파동

거대한 아르카나 대도서관의 심장부, 먼지와 망각이 두텁게 쌓인 ‘금서고’ 가장 깊은 곳. 엘리안은 낡은 비단 천으로 뒤덮인 서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쾌쾌한 종이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인 공기는 숨쉬기조차 버거웠지만, 그는 익숙한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마른기침을 삼켰다. 잿빛 옷 위로 뽀얗게 앉은 먼지는 그의 일상 그 자체였다.

“아, 또 이걸 언제 다 하지.”

엘리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지난 수백 년간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법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낡아빠진 책등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마저도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희미했다. 그는 이곳의 조수로 일한 지 벌써 3년째였지만, 금서고의 존재를 안 것은 겨우 반년 전이었다. 이곳은 대도서관의 사서장조차 좀처럼 발길을 하지 않는, 말 그대로 ‘잊힌 공간’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이곳에는 마법으로 밝히는 수정등마저 어두침침한 빛을 뿜어낼 뿐이었다. 엘리안은 수정등을 더 가까이 끌어당겨 책꽂이의 틈새를 살폈다. 낡은 책들을 솎아내고, 훼손된 부분을 기록하고, 다시 정돈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지루하고 고된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책장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미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영웅담처럼, 언젠가 자신에게도 특별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물론 지금은 그저 먼지와의 전쟁일 뿐이었지만.

손때 묻은 장갑을 낀 손으로 한 책을 빼내자, 묵직한 무게가 손안에 잡혔다. 어둠 속에서 빛깔을 잃어버린 가죽 장정의 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이 빠져나온 자리에는 다른 책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공간이 드러났다.

“응? 이건….”

엘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틈새를 들여다봤다. 책 한 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좁은 공간이었다.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니, 안쪽은 매끄럽고 차가운 돌벽이었다. 보통의 서가는 나무로 되어 있거나, 마법으로 가공된 재료로 만들어지는데, 이곳만 돌벽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엘리안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 깊숙한 곳을 탐색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단단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마치 살아있는 듯한 물질감. 엘리안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돌벽 안쪽의 무언가를 살짝 밀어냈다.

‘끼이익—.’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놀란 엘리안이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벽면이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들어 갔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틈새가 조금 더 벌어지자, 그 안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단순히 먼지를 반사하는 빛이 아니었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몽환적이면서도 영롱한 빛이었다.

엘리안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평생 이런 빛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홀린 듯 손전등 수정구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틈새를 벌렸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었다. 텅 빈 듯한 벽면 중앙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푸른색 돌판 하나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돌판은 사각형이면서도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되어 있었고, 표면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그림이나 지도 같기도 했고, 정교한 기계 장치의 일부 같기도 했다. 그 문양들 사이로는 아까 보았던 푸른색과 보라색의 빛이 가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돌판 자체가 거대한 마법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대체….”

엘리안은 넋을 잃고 돌판을 바라봤다. 대도서관의 모든 책을 통틀어 이런 유물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이건 분명, 대도서관 사서장조차 모르는 고대의 유물일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돌판의 표면에 닿으려는 찰나,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 스쳤다.

‘쨍그랑!’

그 순간, 엘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낡은 천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정적을 깨뜨렸다. 동시에 돌판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른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빛이 엘리안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마치 온 세상이 빛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수천 년 전, 아직 대륙이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던 시절의 풍경.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하늘을 꿰뚫고 솟아 있던 도시.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 너머, 푸른색과 금색의 기운이 뒤섞인 알 수 없는 존재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지금 자신이 만진 것과 똑같은 형태의 돌판을 든 존재가 대지에 강력한 주문을 새기는 모습.

그것은 짧지만 너무나도 생생하고 압도적인 환영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엘리안은 그 모든 것을 마치 실제로 겪은 것처럼 느꼈다. 뼈 속 깊이 파고드는 듯한 낯선 감각, 심장이 격렬하게 울리는 소리, 그리고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기운.

“크윽…!”

엘리안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정신은 혼미해졌고, 호흡은 가빠졌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고통과 동시에, 엄청난 힘이 솟아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환영이 사라진 후에도, 돌판은 여전히 그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금서고의 어둠이 예전처럼 답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 속의 미세한 공기의 흐름, 먼지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엘리안은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숨을 고르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자신이 방금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고대의 마법? 아니면 단순한 환각?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은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돌판을 바라봤다. 이제 빛은 훨씬 약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깃들어 있었다. 돌판의 문양들이 마치 그의 시선에 반응하듯 은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이게… 고대의 힘이라는 건가….’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돌판에 닿았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푸른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연기가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그 연기는 엘리안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마치 손가락 끝에서 실처럼 뻗어나가, 허공에 기묘한 문양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문양이 완성되자, 금서고의 벽면에 박혀 있던 낡은 수정등이 갑자기 환한 빛을 뿜어냈다.

‘쨍!’

수정등이 과부하라도 걸린 듯 폭발하듯 빛나더니, 이내 ‘파직’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엘리안은 경악했다. 그는 마법을 배운 적도 없었고, 대도서관의 일반 조수들에게는 기본적인 마법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끝에서 마법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것도 그의 의식적인 시도 없이, 그저 돌판과 접촉했을 뿐인데.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어봤다. 그의 손금 사이로 아까 돌판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돌판의 일부가 그의 몸에 각인된 것처럼.

공포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전율이 그의 심장을 강타했다. 이것은 분명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영웅담 속의 ‘선택받은 자’들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경계에 서 있다는 직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금서고의 깊은 어둠 속에서, 엘리안은 자신이 마주한 고대의 힘 앞에서 전율했다. 이 작고 검푸른 돌판 하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꿀 열쇠가 될 것이라는 예감. 그리고 그 예감은 묘한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는 조용히 돌판을 다시 숨겨진 공간에 넣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과, 온몸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뜨거운 기운은, 그가 더 이상 평범한 엘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둠 속,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하지만 강렬한 푸른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