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세상의 무지개**
세계가 잿빛으로 물든 지 어언 5년. 폐허가 된 도시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지만, 이따금 스산한 바람이 긁어대는 낡은 건물들의 뼈대만이 한때의 번영을 웅변하는 듯했다. 서지아는 푹 눌러쓴 후드 모자 아래로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수확은 영 시원찮았다. 캔 하나, 반쯤 찢어진 지도 한 조각, 그리고 작동 불능의 손전등 두 개. 이래서는 다음 주를 버티기 어려웠다.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녹슨 철문 틈새에 귀를 기울였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활개를 쳤고, 그 전에 보급품을 찾아 아지트로 돌아가야 했다. 삐걱이는 문을 밀고 들어선 낡은 편의점 안은 온통 먼지와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했다. 절망적인 풍경 속에서, 지아의 눈은 기민하게 쓸만한 것을 찾았다. 진열대가 무너진 잔해 속에서 찌그러진 과자 봉지를 발견하고는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먹을 게 없다는 건 아니지만, 영양가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봐요, 거기 누….”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쪽 구석에 멈췄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나 극과 극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동지 아니면 위협. 그곳에는 한 남자가 쭈그려 앉아 부서진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허리춤까지 오는 배낭이 놓여 있었고, 꽤나 큰 편이었다.
지아는 망설임 없이 손에 든 쇠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거기 당신. 뭐 하는 거야?”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눈은 위협적이기보다는 다소 어리숙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 듯 창백했고, 안경 너머의 눈은 긴장감으로 깜빡였다. “아, 저, 저기… 저는 차현우라고 합니다. 혹시 여기 주인이신가요? 죄송합니다. 그냥 좀… 쓸 만한 부품이 있을까 해서.”
“주인은 무슨 주인.” 지아는 코웃음을 쳤다. “여긴 누구도 주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야. 뭘 찾고 있었는데?”
현우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이게, 제가 예전에 쓰던 건데… 여기 전원부가 망가져서요. 고칠 수 있을까 하고.”
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어? 지금 이 상황에 스마트폰을 고치겠다고? 그걸로 뭘 할 건데? 게임이라도 하게?”
“아니, 그게… 음악을 들을 수 있거든요. 배터리만 어떻게든… 충전하면요.” 현우는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그의 눈빛은 지아의 쇠파이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음악? 지금 이 폐허에서 음악을 들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 지아는 싸늘하게 되물었다.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지금은 사람 만날 기분 아니니까.”
현우는 주춤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저, 저기… 혹시 여기 근처에 ‘회색 식물’이라고 아세요? 뿌리만 있으면 꽤 괜찮은 단백질원인데….”
“회색 식물?” 지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회색 식물은 영양가가 높지만, 독성을 제거하는 데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재료였다. 게다가 워낙 찾기 힘든 터라 그녀도 마지막으로 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어디서 봤는데?”
현우는 눈을 반짝였다. “아, 제가 어제 이 근처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우연히 덤불 속에 몇 개 있더라고요. 캐오지는 못했지만… 독성 제거하는 방법도 알아요!”
지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어딘가 허술해 보이지만,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회색 식물은 지금 그녀에게 절실한 자원이었다.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가. 대신 쓸데없는 짓 하다가 발각되면… 책임 못 져.” 지아는 경고했다.
현우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제가 앞장설게요!”
그렇게 지아와 현우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현우는 정말로 숲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덤불 속에 희미하게 회색빛을 띠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지아는 능숙하게 뿌리만 조심스럽게 캐냈다.
“자, 이걸 이제 어떻게 독성을 제거하는데?” 지아가 물었다.
현우는 배낭에서 작은 냄비와 알코올 램프를 꺼냈다. “간단해요. 이걸 끓는 물에 세 번 삶고, 마지막엔 소금물에 한 번 더 데치면 돼요.”
지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폐허에서 알코올 램프와 냄비라니. “그건 또 어디서 구했어?”
“아, 그게… 제가 좀 모아둔 게 많아서요.” 현우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날 밤, 지아의 아지트에서 둘은 회색 식물로 만든 죽을 나눠 먹었다. 텁텁했지만 오랜만에 먹는 풍부한 단백질원에 지아는 만족감을 느꼈다. 현우는 죽을 먹으면서도 연신 종알거렸다. “근데 지아 씨는 어떻게 혼자 이렇게 잘 버텨오셨어요? 전 길 잃을 때마다 죽을 뻔했는데.”
“경계하고, 믿지 않고, 싸우면 돼.” 지아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무 무섭지 않아요? 혼자 있으면… 저는 밤마다 무서워서 잠이 안 와요. 그래서 잠들 때마다 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이라도 들으려고 고치는 건데…” 현우는 말을 흐렸다.
지아는 현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무섭다고 느낄 감정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현우는 지아의 아지트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가 아지트의 낡은 라디오를 고치고, 물탱크에서 물을 더 효과적으로 필터링하는 방법을 찾아내면서부터였다. 라디오에서는 지직거리는 소리만 났지만, 그래도 폐허가 아닌 세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지아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식량을 구하러 외부에 나갔을 때였다. 그림자 무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맹렬히 쫓아왔다. 지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 정도 규모의 그림자라면 둘이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쪽이야! 지름길로 가자!” 현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는 지아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몸을 던졌다. 지아는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다. 그림자들은 덩치가 커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골목 끝에는 부서진 담벼락이 있었다. “지아 씨, 제 어깨 밟고 올라가세요!” 현우가 몸을 숙였다.
지아는 그의 어깨를 밟고 담벼락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간신히 담벼락을 넘었다.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숨어 있었다.
“하아, 하아… 현우 씨 덕분이야. 고마워.” 지아가 진심으로 말했다.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씨익 웃었다. “뭘요. 혼자면 더 위험했을 텐데요. 지아 씨도 제가 그림자한테 물려 죽는 꼴은 못 보잖아요?”
지아는 대답 대신 현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녀석, 어딘가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함께 폐허 속을 헤치고 다녔다. 현우는 자잘한 기계 부품을 모아 망가진 도구를 고치거나, 작은 태양광 패널을 주워와 지아의 아지트에 희미한 전등을 달았다. 지아는 그런 현우를 못마땅해하면서도, 그의 손재주가 제법 쓸모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느 날 밤, 아지트에서 둘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잿빛 세상이었지만, 밤하늘의 별들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지아 씨, 만약 이 세상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다면 뭘 하고 싶어요?” 현우가 조용히 물었다.
지아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다. “상상해본 적 없어.”
“저는… 다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요.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하루 종일 읽고요. 아, 그리고 콘서트에도 가고 싶다!” 현우는 눈을 감고 행복한 상상에 잠긴 듯했다.
지아는 현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옆에 온 이후로, 잿빛이던 세상에 작은 색깔들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퉁명스러운 자신과 달리 현우는 긍정적이고,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해맑았다.
“현우 씨는… 좀 바보 같아.” 지아가 중얼거렸다.
현우는 눈을 뜨고 지아를 바라봤다. “바보 같은 게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는 거예요. 지아 씨도 너무 세상을 잿빛으로만 보지 말아요. 이 세상에도 예쁜 건 많아요.”
그는 주머니에서 작고 찌그러진 금속 조각을 꺼냈다. 빛을 받으니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조각이었다. “이거… 어제 부서진 보석상에서 주운 건데. 지아 씨 주려고.”
지아는 조심스럽게 그 조각을 받아 들었다. 손톱만큼 작은 금속 조각이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빛나는 물건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이런 걸 지금 이 세상에서 어디에 쓴다고….”
“그냥요. 예쁘잖아요.” 현우가 씨익 웃었다. 그의 미소는 별빛 아래에서 더욱 환하게 빛났다.
지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미소는 잿빛 세상에 떨어진 한 줄기 무지개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필요 없어.”
“그래도 제가 드린 거니까, 간직해줘요.” 현우는 시무룩해하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지아의 귀에 속삭였다. “아, 그리고 오늘 밤은 제가 특별히 아껴둔 통조림을 땄어요. 이름하여 ‘환상의 고기 통조림!’”
“환상은 무슨 환상.” 지아는 핀잔을 줬지만,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둘은 밤늦도록 모닥불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현우가 찾아낸 낡은 스마트폰으로 겨우 충전된 배터리로 흐릿하게 들려오는 옛날 노래를 들었다. 현우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지아는 그를 따라 어깨를 들썩였다.
폐허는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지아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이 잿빛 세상 속에서, 현우는 그녀만의 작은 무지개였다는 것을. 어쩌면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바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내일을 꿈꾸는 것이었다.
“야, 차현우.”
“응? 왜요, 지아 씨?”
“내일은… 저번에 말했던 그 동네 도서관에 가보자. 네가 고치고 싶어 했던 책들 많을 것 같으니까.”
현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짜요?! 좋아요! 그럼 내일은 제가 짐 다 짊어질게요!”
지아는 그의 등짝을 가볍게 툭 쳤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현우는 지아가 준 작은 금속 조각을 쥐고 잠이 들었다. 조각은 그의 손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잿빛 세상의 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아지트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엉뚱한 사건과 함께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