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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빛 도시의 작은 숨통

어스름이 짙게 깔린 도시의 잔해 속으로, 세 개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한때는 번화했을 거리가 이제는 찢겨나간 콘크리트 조각과 뒤엉킨 철근, 그리고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이 삭막한 고층 빌딩의 뼈대 사이를 휘감으며 으스스한 울음을 토해냈다.

선두에 서서 주위를 살피던 리안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도, 잠자리도 찾지 못했다. 발밑에 밟히는 파편들이 자꾸만 불안한 소리를 냈다.

“리안 오빠, 저기… 물통이 거의 비었어요.”

뒤따르던 미나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앳된 미나의 얼굴에는 피로와 갈증이 역력했다. 리안은 굳게 다문 입술을 살짝 열었다.

“알아. 조금만 더 버티자. 아마 이 근처에… 지하수가 흐르던 곳이 있었을 거야.”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아마’라는 단어는 곧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강건이 묵묵히 리안의 옆을 지켰다. 덩치 큰 그의 등에는 낡은 배낭과 함께 고장 난 듯 보이는 금속 탐지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말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때는 작은 공원이었을 자리였다. 삭막한 콘크리트 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기적처럼 작은 연못 하나가 남아 있었다. 연못 주변으로는 무성한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고, 흙먼지에 뒤덮였을 법한 작은 꽃잎들이 희미한 달빛 아래 반짝였다.

“와…!”

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연못 가장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흙탕물처럼 탁하긴 해도, 물은 분명 있었다. 강건이 먼저 다가가 휴대용 필터로 물을 걸렀다. 몇 분 후, 플라스틱 물통에 깨끗하게 정화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미나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마셔도 돼요, 강건 오빠?”

“응. 괜찮아.”

강건은 짧게 대답하고는 물통을 건넸다. 미나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목마름이 가시는 듯한 시원한 소리가 삭막한 적막을 잠시 깨뜨렸다. 리안도 물을 받아 마셨다. 물은 미지근했지만,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자.”

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세 사람은 연못가의 풀숲에 자리를 잡았다. 강건은 주변을 한 바퀴 돌며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엉성하게나마 울타리를 쳤다. 리안은 배낭에서 겨우 찾아낸 말린 육포와 건과일을 꺼냈다. 그나마 남아있는 비상식량이었다.

“너무 적다…”

미나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안은 미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오늘은 물이라도 얻었잖아. 이걸로 충분해. 다 같이 살아서 내일도 보고, 모레도 봐야지.”

리안의 말에 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작은 식량을 나눠 먹었다. 한입 한입이 소중했다. 배가 차지 않을 양이었지만, 목마름이 해소되고 잠시나마 안전한 곳에 머무른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듯했다.

강건은 말없이 망가진 금속 탐지기를 손봤다. 그의 투박한 손길은 기계에 대한 묘한 애착을 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탐지기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어쩌면 살아남아야 할 이유의 일부인지도 몰랐다.

리안은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하늘에 드문드문 별들이 박혀 있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불빛 하나 없으니 별들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그 작은 빛들이 마치 이 황폐한 세상에서도 희망은 아직 존재한다는 듯 속삭이는 것 같았다.

“리안 오빠, 저 꽃 좀 봐요. 이름이 뭐예요?”

미나가 손가락으로 연못가에 피어있는 작은 보랏빛 꽃을 가리켰다. 리안은 고개를 돌려 꽃을 바라봤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힘겹게 피어난 그 꽃은, 마치 미나의 맑은 눈동자를 닮은 듯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예쁘네.”

리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투쟁의 연속이었지만,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순간들이 그들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뒤섞인, 짐승의 포효 같은 것이었다. 소리는 멀지 않은 곳, 그들이 방금 지나온 낡은 빌딩 숲에서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의 얼굴에서 동시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강건은 순간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금속 탐지기를 내려놓고 허리춤의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리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평온했던 순간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뭐… 뭐지?” 미나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조용히 해.” 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은 이미 소리가 들려온 방향, 잿빛 빌딩의 어둠 속을 꿰뚫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그 어떤 소리도 좋은 징조일 리 없었다.

강건은 몸을 낮춰 귀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움직임이… 빨라.” 강건이 낮게 읊조렸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낡은 건물 사이에서 기괴한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그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덩어리였지만, 빠르고 민첩했으며, 무엇보다… 굶주린 듯한 짐승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리안은 미나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강건과 함께 동시에 몸을 웅크렸다. 연못가의 작은 꽃들은 여전히 미약하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이 짐승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기운이 폐허의 밤공기를 갈랐다.

이제 이 작은 숨통마저도 위협받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의 한가운데로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