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적막한 주방의 속삭임
고작 스물여덟. 지훈은 자신이 이 아파트에서 가장 평화로운 인간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다 일어났고, 퉁퉁 부은 얼굴로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냉장고. 그 흔한 먹을거리 하나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쾅. 생각보다 큰 소리가 울렸다.
“젠장, 민폐 작작 끼쳐라, 지훈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컵라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끓는 물을 부으려는데, 문득 주방 등에서 깜빡임이 시작됐다. 전구의 수명이 다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을 끓였다. 칙칙폭폭, 전기포트의 스팀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창문에 흐릿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창밖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아니, 평화로워 *보였다*. 서울 한복판, 높은 아파트 숲 사이로 작게 보이는 자동차와 개미 같은 사람들. 언제나 소음으로 가득했던 이 도시가 오늘따라 유독 조용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라면에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들었다.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은 어제 새벽에 올린 개그짤 이후로 잠잠했다. 뉴스 피드에는 온통 연예인 스캔들뿐이었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윗집인가?” 낡은 아파트라 층간 소음이 종종 있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라면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막 한 젓가락을 뜨려는 순간, 이번엔 부엌 한쪽 벽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스슥. 마치 손톱으로 긁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뭐야, 쥐인가?”
지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싱크대 아래 수납장 쪽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소리는 멈췄다. 잠시 기다려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별일 아닌가 싶어 다시 라면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 번 신경 쓰자니,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라면 국물이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그의 귀는 벽 속의 미세한 소리에 집중했다.
밤이 되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덮쳤다. 도시의 소음이 줄어들수록, 집 안의 작은 소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똑, 똑, 똑. 수도꼭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분명히 닫아두었던 문인데,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지훈은 거실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던 손을 멈췄다.
“누구… 없어?”
말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안방으로 가는 복도는 어둡고 길게만 느껴졌다. 발소리를 죽이며 안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스위치를 켜려는데, 문이 다시 삐걱이며 닫혔다. 쾅.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젠장, 뭐야? 바람인가?”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무도 없었다. 침대도, 옷장도, 책상도 그대로였다. 그의 불안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증폭됐다.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너무 오래 혼자 있어서 환청이 들리나?
다음 날도 이상한 일은 계속됐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오니, 분명히 잠가두었던 화장실 문이 열려 있었다. 식탁 위에는 그가 어제 분명히 먹어 치웠던 라면 봉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용물은 없었지만, 봉지는 찌그러진 채로.
“이게 대체… 뭐야.”
지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가? 잠시 쉬어야 하나? 그는 노트북을 켜고 ‘폴터가이스트 현상’, ‘아파트 이상한 소리’ 같은 검색어를 입력했다. 온갖 괴담과 미신, 과학적 설명을 뒤섞은 정보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의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날 저녁, 끔찍한 절정에 이르렀다. 지훈은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도시의 밤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평소 같으면 들려야 할 자동차 경적 소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 혼자만 남은 것 같은 기괴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때, 주방 쪽에서 다시 긁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스슥. 이번에는 소리가 더 선명하고 가까웠다. 지훈은 망설였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근원지는 냉장고였다. 오래된 냉장고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문이 아주 미세하게, 틈을 벌리고 있었다. 지훈은 숨을 참고 냉장고 문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 냉장고 문이 천천히, 마치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활짝 열렸다.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안쪽에서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 사이에서,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썩은 살점과 피, 그리고 하수구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악취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이 굳어버렸다. 냉장고 안, 검은 그림자는 이제 희미한 형체를 띠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젖은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꿀꺽… 꿀꺽…*
마치 목구멍 속에서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끔찍하게 변조된 속삭임.
“…지…훈아…”
그의 이름이었다. 불쾌하게 일그러진, 알아들을 수 없는 저음의 목소리.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전등이 깜빡이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훈은 냉장고 안의 검은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끔찍한 악취는 코를 뚫고 뇌를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냉장고 문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지훈을 향해 닫혔다. 콰앙!
지훈은 뒤로 나자빠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둠 속에서 오직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냉장고 문은 다시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는 여전히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벽 너머에서 무언가 긁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스스슥… 스스스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