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잿빛 도시의 그림자**
희뿌연 하늘은 언제나 그랬듯 재빛이었다. 먼지 섞인 바람이 뼈가 드러난 빌딩 숲 사이를 휘돌아 지나갔다. 십 년 전, 그 ‘멸망의 밤’ 이후로 세상은 이렇게 황폐한 색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유나는 낡은 천 조각으로 입을 가린 채 주저앉은 고층 건물의 잔해를 타고 내려왔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돌멩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젠장, 오늘도 빈손인가.”
작게 읊조린 목소리가 거친 바람에 흩어졌다. 어깨에 멘 낡은 가방은 축 늘어져 있었다. 몇 시간째 이 폐허를 헤매고 있지만, 오늘 건진 것이라고는 녹슨 금속 조각 몇 개와 바스러진 전선 다발뿐이었다. 식량은 사흘 전 간신히 찾아낸 건조 식량이 전부였고, 물은 어제 겨우 정화 장치로 걸러낸 한 모금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유나는 무너진 도로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한때 차량으로 가득했을 도로는 이제 검붉게 말라붙은 흙과 자라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드문드문 삐죽이 솟아난 철근 조각들이 과거의 흔적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깨진 유리 조각 너머의 어두운 실내, 쓰러진 간판 아래의 그림자, 심지어는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살폈다. 이 폐허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굶주린 이형의 짐승들, 혹은 더 위험한 인간들.
“아직 멀었나…”
유나는 지도도 없는 머릿속 지형을 더듬었다. 예전에 이 지역은 ‘생명 공학 연구소’가 있던 곳이었다. 멸망 전에도 외부인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곳. 어쩌면 그곳이라면… 뭔가 쓸모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그녀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그 ‘쓸모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의 막막함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불안한 기대를 품었을 뿐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나는 순식간에 몸을 낮춰 폐건물 외벽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낡은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바람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규칙적이고 무거운 소음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이 저절로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척추뼈가 그대로 드러난 기괴한 형상, 날카로운 발톱과 짐승의 머리. ‘그늘짐승’이었다. 멸망의 밤 이후, 황폐해진 세상에서 태어난 변이된 생명체들. 햇빛을 싫어하고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는 이 짐승들은,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덩치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늘짐승은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먹이를 찾는 듯했다. 유나는 숨을 멈췄다. 작은 먼지 하나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불규칙하게 울렸다. 녀석의 시선이 자신이 숨어 있는 건물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왜 하필 여기에…’
그늘짐승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한참을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유나가 방금 내려왔던 폐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놈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대로 놈을 놓아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놈이 사라지면, 이 폐허 속에서 다시는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유나는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 놈의 움직임이 둔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 뿐이었다. 한 번 사냥감을 발견하면, 놈들은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녀는 최대한 소리 없이 녀석의 뒤를 쫓았다. 놈이 무너진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이대로는 무리다. 실내에서 저런 거구의 짐승과 맞붙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유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옅은 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재빛이었던 하늘을 닮은,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선명한 은회색의 빛. 그녀의 낡은 옷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움직임에 최적화된, 얇지만 견고해 보이는 전투복으로 바뀌었다. 손에는 빛나는 마법봉이 소환되었다. 길고 날렵한 은색 봉의 끝에는 투명한 크리스탈이 박혀 있었다.
“후우…”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전과는 다른, 단단하고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나. 그리고 그녀는 이 멸망한 세계의 마지막 ‘마법소녀’였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소녀’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지만, 그렇게 불리는 수밖에 없었다.
유나는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마법봉이 그녀의 앞길을 밝혔다. 내부의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더 차갑고 습했다. 곰팡이 냄새와 썩어가는 금속 냄새가 뒤섞여 역한 기운을 풍겼다. 복도는 무너진 천장 잔해와 정체 모를 잔해들로 가득했다.
앞서 들어간 그늘짐승의 흔적은 명확했다. 녀석의 발톱 자국이 콘크리트 바닥에 깊게 파여 있었고, 퀴퀴한 짐승 냄새가 진동했다. 녀석은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다.
‘무엇 때문에 저런 놈이 여기까지 들어왔지?’
유나는 의아했다. 그늘짐승은 보통 먹이를 찾기 위해 어슬렁거릴 뿐,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더욱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녀는 넓은 홀에 다다랐다. 한때 실험실이었던 듯 보이는 곳이었다. 깨진 유리관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녹슨 기계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홀 한가운데에, 그늘짐승이 서 있었다. 녀석의 시선은 한 지점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유나는 녀석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늘짐승이 바라보고 있던 것은… 쓰러진 거대한 금속 선반 너머, 벽에 난 작은 균열이었다. 균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흙먼지 속에서 겨우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푸른색의 빛이었다.
그 빛은… 생명력이었다.
마법소녀의 힘으로 감지할 수 있는, 순수한 생명 에너지.
멸망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아니, 변이된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진짜’ 생명력이었다.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그늘짐승이 그 빛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놈은 그 빛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거기까지.”
유나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늘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핏빛 눈동자가 유나를 향했다.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위협적인 기운이 유나를 덮쳤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마법봉에서 은회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빠르게 형체를 이루어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했다. 유나는 마법봉을 휘둘렀다. 빛의 칼날이 그늘짐승을 향해 날아갔다. 녀석은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이었다.
그늘짐승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달려들었다. 유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등 뒤에서 콘크리트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힘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하아… 쉽지 않겠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저 빛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것은… 이 황폐한 세상에 단 한 조각 남아있는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유나는 마법봉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법봉의 크리스탈이 더욱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회색 아우라가 더욱 선명해졌다.
“별에게 맹세한 빛이여, 이 세상의 어둠을 가르고 진정한 생명을 밝히소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법봉 끝에서 거대한 빛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홀을 가득 채웠다. 그늘짐승은 빛의 기운에 주춤거리는 듯했다. 놈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사라져, 어둠의 잔해여!”
빛의 구체가 그늘짐승을 향해 날아갔다. 놈은 피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압도적인 빛의 폭발이 홀을 뒤흔들었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빛이 사그라들고, 그늘짐승이 서 있던 자리에는 검은 재만 남았다.
유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마법소녀의 힘은 강력했지만, 그만큼 막대한 마력을 소모했다. 이렇게까지 마력을 사용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젠장, 이런 곳에서…”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법봉이 힘없이 땅에 부딪히며 사라졌다. 전투복은 다시 낡은 천 조각으로 돌아왔고,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지탱하며 벽에 기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벽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 빛.
유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빛을 향해 다가갔다. 균열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균열의 안쪽을 더듬었다. 차가운 벽의 감촉.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작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감촉.
균열을 통해 드러난 것은… 한 송이의 꽃이었다.
푸른색의 빛을 발하는, 작고 여린 꽃. 멸망 이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살아 있는 꽃이었다.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꽃을 바라봤다. 완벽하게 푸른색. 이 황폐한 세상의 모든 것이 재빛으로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꽃은 순수한 생명의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 희망을 응축해 놓은 듯했다.
꽃잎을 가만히 어루만지자, 손끝으로 따뜻한 생명 에너지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지친 몸에 미약하지만 새로운 활력이 돋아나는 듯했다.
“이게… 살아있었다니…”
유나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멸망의 밤 이후, 그녀의 마음은 마치 이 폐허처럼 메말라 있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사치였고,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은 꽃 한 송이가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이 꽃은 어디서 자라난 것일까? 그리고 왜 이곳에 홀로 숨어 있었던 것일까?
이 작은 꽃이, 이 멸망한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나는 조심스럽게 꽃을 꺾었다. 작은 꽃 한 송이가 그녀의 손안에서 푸른 빛을 발했다.
더 이상 빈손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어딘가에 희망이 숨 쉬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녀는 꽃을 낡은 옷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홀로 남은 폐허 속에서, 작은 푸른빛이 그녀의 마음속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었다.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은, 생존 이상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유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피곤했지만, 발걸음은 이전보다 가벼워진 듯했다.
그녀는 무너진 건물을 뒤로하고, 다시 잿빛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안의 작은 푸른빛을 가슴에 품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