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먼지가 폐허의 잔해 위를 춤추듯 날렸다. 한때 거대한 도시였던 곳은 이제 시간과 재앙이 휩쓸고 간 거대한 무덤에 불과했다. 바람이 부서진 콘크리트 틈새를 훑고 지나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흡사 거대한 짐승의 울음처럼 들렸다. 그 소리마저 삼킬 듯, 현오의 뱃속에서 굶주림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현오는 낡고 해진 두건을 바싹 조여 매고,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발걸음을 옮겼다. 닳아 빠진 철제 검 손잡이를 쥔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거칠었다. 지난 사흘간 입에 넣은 것이라곤 바싹 마른 들풀과 빗물을 받은 웅덩이의 흙탕물뿐이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고요한 구역’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도시가 멸망하기 전, 어떤 거대한 힘이 충돌했던 자리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기이한 물질이나, 기적처럼 온전하게 남은 보급품이 간혹 발견되기도 했다. 물론, 그만큼 위험한 변종 생물이나, 현오 같은 약탈자들이 들끓는 곳이기도 했다.
“크르륵…”
목구멍에서 절로 밭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삐걱거리는 철골 잔해 아래를 기어가듯 빠져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여 있었고, 바닥은 갈라지고 솟아올라 기괴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썩어가는 악취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현오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 하나조차 피하며, 마치 그림자처럼 폐허 속을 헤쳐나갔다. 그의 눈은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려 애썼다. 으스러진 벽돌 더미, 검게 그을린 구조물, 그리고 먼지 속에 박힌 기이한 형상들. 그 모든 것이 잠재적인 위협이자, 어쩌면 생명의 실마리일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무너진 백화점 잔해 더미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금속 조각이 현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크게 뛰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는 잔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뾰족한 철근과 날카로운 파편들이 스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기어들어갔다.
마침내 손에 닿은 것은 군용 보급상자였다. 겉은 녹슬고 찌그러져 있었지만,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다. 현오는 온 힘을 다해 틈새를 벌렸다. 삐걱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상자가 열리자, 그의 눈은 경악과 기대로 크게 벌어졌다.
상자 안에는 멸망 전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전투 식량이 몇 개 들어있었다. 비록 포장재는 낡았지만, 기적적으로 내용물은 온전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바싹 마른 가죽 주머니와, 눅눅해진 천 조각에 싸인 작은 목갑이 있었다.
현오는 떨리는 손으로 전투 식량 하나를 꺼내 들었다. 뜯기 전부터 고소한 향이 희미하게 풍겨왔다. 당장이라도 허겁지겁 입에 넣고 싶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생존자에게 흥분은 독이었다. 그는 일단 식량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고,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 안에는 몇 개의 낡은 동전과 함께, 기름종이에 싸인 낡은 비단 조각이 들어 있었다. 멸망 전의 고대 문자로 보이는 글자들이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었지만, 너무 낡아 알아보기 힘들었다.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비급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오는 순간적으로 피식 웃었다. 이런 세상에 무공이 무슨 소용이랴. 한 조각의 빵이 비급보다 귀한 것을.
그때였다.
서늘한 그림자가 현오를 덮쳤다. 그의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에 그는 몸을 굳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세 명의 그림자가 폐허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칼날을, 손에는 몽둥이를 든 사내들. 그들의 눈은 굶주린 짐승의 그것처럼 이글거렸다.
그들은 이 폐허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약탈단, ‘검은 송곳니’ 무리였다. 잔인하고 무자비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어이, 꼬마.”
선두에 선 사내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상처로 일그러져 있었고, 왼쪽 눈은 희끄무레한 막에 덮여 있었다. ‘외눈박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그는 현오의 손에 들린 보급품과 목갑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좋은 걸 주웠군. 어서 이리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현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녹슨 철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발악하듯 뛰기 시작했다. 놈들은 셋. 자신은 하나.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에게 생명 그 자체였다.
“흐음… 욕심이 많은 꼬마로군.”
외눈박이가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폐허에 메아리치며 혐오스럽게 울렸다. 나머지 두 명의 약탈자도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들의 눈빛은 살기로 번득였다.
“힘들게 찾아낸 보급품이다. 너희 같은 개들에게 줄 수는 없다.”
현오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냉기가 감돌았다. 외눈박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건방진 것. 그 빌어먹을 검이 얼마나 너를 지켜줄지 두고 보마.”
외눈박이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두 사내가 달려들었다. 한 명은 굵은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현오의 머리를 노렸고, 다른 한 명은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현오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몽둥이를 피하고, 동시에 철검을 뽑아 단검을 쳐냈다. ‘챙강!’ 둔탁한 금속음이 폐허에 울려 퍼졌다. 단검을 든 사내가 뒤로 물러나자, 현오는 틈을 놓치지 않고 몽둥이를 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철검은 낡았지만, 그의 손놀림은 빨랐다. ‘섬광비검(閃光飛劍)’. 그가 폐허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검보를 통해 어깨너머로 익힌 유일한 검술이었다. 현란하진 않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궤적과 빠른 속도로 적을 교란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번개처럼 검이 번뜩이며 사내의 팔목을 스쳤다. ‘컥!’ 짧은 비명과 함께 사내의 몽둥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팔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현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어 단검을 든 사내에게 검을 날렸다. 사내가 급히 방어하려 했지만, 그의 검은 이미 사내의 어깨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이런 씨발!”
사내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주춤거렸다. 현오는 두 명의 약탈자를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더욱 격렬하게 뛰었다. 외눈박이가 가만히 서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법석이군. 꼬마, 제법 쓸 줄 아는군.”
외눈박이는 허리춤에서 시커먼 칼날의 대도를 뽑아 들었다. 칼날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기분 나쁜 광택이 감돌았다. 그가 대도를 한 번 휘두르자,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현오의 귀를 찢을 듯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외눈박이가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앞서 두 약탈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그는 맹수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현오에게 달려들었다. 대도가 현오의 머리를 노리고 묵직하게 내려찍혔다.
현오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콰앙!’ 대도가 그의 바로 옆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했고, 거대한 충격과 함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현오는 휘청거렸지만, 즉시 자세를 잡고 검으로 반격했다.
‘챙, 챙, 쨍그랑!’
현오의 철검과 외눈박이의 대도가 쉴 새 없이 부딪쳤다. 현오의 섬광비검은 외눈박이의 묵직한 대도 앞에서는 종이 조각처럼 가벼웠다. 그는 날카로운 검날로 외눈박이의 허점을 파고들려 했지만, 외눈박이의 방어는 견고했다. 그의 대도는 마치 살아있는 방패처럼 현오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위험했다. 현오는 외눈박이의 무지막지한 힘과 노련함에 밀리기 시작했다. 그의 팔이 저릿했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거대한 대도가 현오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오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어깨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크윽…!”
현오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외눈박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대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현오의 머리였다. 현오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때, 현오의 눈에 낡은 백화점 기둥의 철근이 보였다. 그는 주저 없이 검을 거두고, 온몸을 던져 철근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철근을 위로 당겼다. ‘우드득!’ 낡은 철근이 비명을 지르며 기둥에서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균열이 기둥 전체로 퍼져나갔다.
외눈박이는 현오의 기습적인 행동에 당황했다. 그는 멈칫하며 현오를 바라보았다.
“이 미친…!”
현오는 무너지는 기둥을 뒤로하고 몸을 날렸다. ‘콰콰광!’ 굉음과 함께 낡은 기둥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었고, 외눈박이와 남은 약탈자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오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어깨에서 솟아나는 피가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폐허의 미로를 따라 무작정 내달렸다. 뒤에서 외눈박이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현오는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한참을 달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느 낡은 지하 배수로 입구에 몸을 숨겼다. 철제 뚜껑을 겨우 닫고 어둠 속에 몸을 웅크렸다. 어깨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다. 가지고 있던 낡은 천 조각으로 급히 지혈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까 그 전투 식량과 가죽 주머니는 다행히 품에 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배수로 안을 살폈다. 썩어가는 악취와 습기가 가득했지만, 적어도 당장은 안전한 듯했다. 멀리서 외눈박이 일당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내 멀어지는 듯했다.
현오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살아남았다. 또 한 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그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배수로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어둠 속 통로가 보였다. 어쩌면 이대로 쭉 나아가면 이 지옥 같은 폐허를 벗어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배수로 깊은 곳에서, 현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낮고 굵은 울림이 전해져왔다. 그 울림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심장 박동을 울리는 듯했다. 벽을 타고 전해져오는 진동에 현오는 몸을 굳혔다. 외눈박이의 고함소리도, 바람소리도 아닌, 훨씬 더 거대하고 원초적인 위협의 소리였다.
현오는 숨조차 쉬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쿵, 쿵… 그 진동은 점차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어둠 속 통로 깊은 곳에서, 두 개의 섬뜩한 녹색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는 것을 현오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생물의 눈이었다.
그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외눈박이 일당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과 공포가 그의 정신을 짓눌렀다. 현오는 절망적인 시선으로 어둠 속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더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든 것뿐이었다.
쿵… 쿵… 그르르릉…
녹색 불꽃이 이글거리는 어둠 속에서, 섬뜩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낡은 철검을 다시 움켜쥐었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