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 틈 사이로 새어 드는 눅진한 지하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서준은 낡은 철골 구조물에 몸을 기댄 채, 눈앞에 펼쳐진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했다. 며칠 전, 지상으로의 보급로를 뚫으려던 시도는 참혹한 실패로 돌아갔다. 스무 명이 넘었던 동지들은 이제 열 명도 채 남지 않았다. 비릿한 쇠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듯했다. 제국의 칠흑 기사단은 그림자처럼 어디에나 있었다.
“서준 씨.”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서준은 고개를 돌렸다. 연화였다. 낡은 천으로 감싼 팔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만큼이나 지쳐 보였다.
“식량이 바닥나고 있어요. 다음 보급품은 기약도 없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현실감이 묻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는 굶어 죽거나, 기사단에게 발각돼 처형당할 거예요.”
서준은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지하 은신처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제국은 발톱을 더욱 깊숙이 박아 넣고 있었다. 지상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진동,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 소리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때, 은신처 가장 깊은 곳, 흙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할매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때가 되었어.”
모두의 시선이 할매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흡사 고대 문양 같았고, 깊게 패인 눈가에는 세상의 모든 비극이 담겨 있는 듯했다.
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할매?”
할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비록 흐릿했지만, 그 속에는 심연을 들여다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서려 있었다. “제국의 심장은 어둠에 물들어 있어. 그 어둠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린 영원히 그림자 속에서 헤맬 뿐이야.” 할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울림은 은신처 전체를 채우는 듯했다. “아직 이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 있지. 오래전, 제국의 뿌리가 뻗기 시작할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
연화가 불안한 듯 끼어들었다. “할매, 설마 옛 계약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건 금지된 주술이잖아요. 우리를 파멸로 이끌 거예요!”
“파멸이라…” 할매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린 이미 파멸의 문턱에 서 있지 않더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 그녀의 시선이 서준에게 닿았다. “선택은 네 몫이다, 서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딛어 진실을 마주하든가.”
서준의 마음속에서 격렬한 갈등이 일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동지들의 굶주린 얼굴과 희망 없는 눈빛, 그리고 어제 죽어간 이들의 비명 소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알겠습니다, 할매.”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단호했다. “어떻게 해야 하죠?”
할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따라오너라. 빛이 닿지 않는 곳, 망각된 시간 속에 잠든 폐허가 된 신전으로.”
그들은 칠흑 같은 지하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축축한 공기, 발밑에 밟히는 이름 모를 잔해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의 끝에는 잊힌 신전의 폐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돌기둥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제단으로 보이는 거대한 돌덩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희미하게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할매는 낡은 천 주머니에서 말린 약초와 오래된 양피지 조각들을 꺼냈다. 그녀는 제단 주위에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배치했다. 서준과 연화는 긴장한 채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피가 필요해.” 할매가 나직이 말했다.
연화가 망설였다. “누구의 피를…”
“나의 피로 충분하다.” 할매는 칼집에서 낡은 단검을 뽑아 자신의 손바닥을 긋고, 피를 제단 위에 떨어뜨렸다. 붉은 액체가 차가운 돌에 스며들자, 제단의 고대 문양들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할매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의 언어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고 쉰 듯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공간을 뒤흔드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바람이 불어왔고,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제단 중앙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기는 점점 짙어지며 형체를 갖추는 듯했다. 그것은 명확한 형체가 없었지만, 그 존재 자체에서 엄청난 무게감과 서늘한 공포가 느껴졌다. 마치 수만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악몽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서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듯했다.
“무… 뭐야 저게?” 연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기는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그림자 형상으로 굳어졌다. 그 형상에서 수많은 눈들이 섬뜩하게 빛나며 그들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눈이 아니었다. 어둠이 뭉쳐 만들어진, 형언할 수 없는 소용돌이였다.
그 순간, 서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이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제국의 수도, ‘아스타니아’의 거대한 궁전.
궁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밀실.
그 밀실 한가운데 놓인, 끔찍하게 뒤틀린 육체. 인간의 것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촉수와 비늘, 그리고 수많은 입이 뒤엉킨 거대한 괴물.
괴물은 마치 거미줄처럼 제국 전체에 촉수를 뻗고 있었고, 그 촉수는 도시의 모든 생명에게서 생기와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황제는 무릎 꿇은 채, 그 괴물의 발아래 엎드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로 물든 심장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괴물에게 바치고 있었다.
“제국의 진정한 주인은… 저것이었어!” 서준은 충격과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를 뻔했다.
괴물의 형상은 다시 흔들리며 사라지는 듯했지만, 마지막으로 섬뜩한 속삭임이 서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너희는 이미 저주받았다… 대가는… 치러질 것이다…”*
연화가 서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서준 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서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가 본 광경은 너무나 생생했고, 너무나 끔찍했다. 제국은 단지 부패한 인간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 뿌리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태초의 악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은신처 위쪽에서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지하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젠장! 무슨 일이지?” 연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내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하 통로를 부수고 내려오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우리가… 우리가 너무 깊은 곳을 건드린 건가…?” 서준의 입술에서 허탈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할매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더러운 쥐새끼들이… 주인의 안식을 방해하는가?”
이것은 서준이 방금 본, 그 괴물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사냥개의 짖는 소리처럼 날카롭고 잔인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신전 입구에서 칠흑 같은 그림자들이 드리워졌다. 강철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섬뜩하게 번뜩이는 칼날.
칠흑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정확히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펼쳐진 고대 주술의 흔적을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서준은 망연자실한 채, 제단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붉은 피 자국과 자신들을 둘러싼 칠흑 기사단, 그리고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괴물의 속삭임 사이에서 얼어붙었다.
이제, 그들은 어디로 도망쳐야 한단 말인가.
지상도, 지하도, 그들에게 허락된 곳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