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붉은 달이 드리운 밤
어둠이 막 발을 들이기 시작한 시각, 도시의 빌딩 숲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퇴근길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소리, 지극히 평범한 열아홉 살 여고생. 내 삶은 마치 밋밋한 흑백 필름 같았다. 가끔씩 꿈속에서 기이하고 아름다운 빛의 파편들을 보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현실은 그저 낡은 참고서와 시험지, 그리고 저녁 메뉴 걱정으로 가득했다.
“젠장, 또 지각이야!”
앞서 가던 친구 은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오늘 방과 후 보충 수업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일찌감치 학원에 도착했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발목에 쇠라도 단 것처럼 축축 처졌다.
“기다려, 은하야! 나 오늘 왜 이렇게 몸이 안 좋지?”
어깨에 맨 책가방이 천근만근 같았다. 빌딩 사이로 붉게 타오르던 노을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변해 도시를 감싸 안았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묘하게 일그러진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름달은 아니었지만, 그 섬뜩하리만큼 붉은 빛깔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피처럼 짙고, 불길한 예감처럼 강렬했다.
그 순간이었다.
정적. 아니, 정적이 아니었다. 모든 소리가 마치 필터라도 씌워진 듯 아득하게 멀어졌다. 북적이던 거리가 갑자기 거대한 침묵 속으로 잠기는 기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자동차 경적 소리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마저도 희미해졌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이상한 냄새. 쇠 비린내 같기도 하고, 썩은 흙냄새 같기도 한 역겨운 악취였다.
은하가 “소리야, 저게 뭐야?” 하고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시선은 이미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달빛 아래, 빌딩의 가장 높은 첨탑 위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거대한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검고 찢어진 천 조각 같은 날개, 그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짐승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기괴한 형상. 비대한 몸집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은 이 도시의 모든 공포를 응축한 듯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뒤늦게 귓가에 쏟아져 들어왔다. 필터가 제거된 듯, 모든 소리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괴물이다! 도망쳐!”
혼란이 한순간에 거리를 덮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은하는 내 손을 잡고 “소리야, 이쪽이야! 빨리!” 하며 끌어당겼다. 나 역시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본능적인 공포가 심장을 쥐어짰다. 저것은 꿈속의 파편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쿵!
괴물이 지상으로 착지했다. 육중한 몸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며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주변의 상점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비명과 파열음이 뒤섞여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괴물의 붉은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공포가 증폭되는 듯했다.
“은하야, 저쪽으로 가자!”
나는 은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건물 뒤편의 좁은 골목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괴물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빨랐다. 거대한 날개를 한 번 휘두르자 강풍이 일었고,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콰앙!
괴물의 발톱이 우리가 달려가던 골목 입구를 짓밟았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은하는 놀라 뒤로 나자빠졌고, 나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극심한 고통이 발목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흐읍, 흐으…”
괴물의 붉은 눈이 우리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한없이 작고 무력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목덜미를 덮쳐오는 기분. 나는 주저앉아 고통에 신음하는 은하를 보호하듯 팔로 감쌌다. 도망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바로 그때,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에서 따뜻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평소에는 그저 평범한 은색 목걸이였다. 푸른 보석이 박혀 있어 친구들이 “예쁘다, 어디서 샀어?” 하고 묻곤 했지만, 사실은 어릴 적 부모님에게 선물 받은 평범한 장신구였다.
하지만 지금, 펜던트는 내 심장처럼 빠르게 맥동하며 강렬한 빛을 냈다. 푸른 보석은 마치 작은 별이라도 품은 듯이 반짝였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깨어나라, 수호자여. 절망에 굴하지 마라. 너의 심장에 깃든 빛을 해방시켜라.
“수호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열기와 의지가 채웠다. 은하를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아!”
나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펜던트는 손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내 몸을 감쌌고, 나는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내 몸을 감싼 빛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선명해졌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흰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제복. 팔과 다리에는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달려 있었다. 허리에는 푸른색 리본이 우아하게 묶여 있었고, 등 뒤로는 투명한 날개가 반짝였다. 머리에는 은색 장식이 달린 티아라가 얹혀 있었고, 펜던트는 가슴 중앙에서 빛나는 브로치로 변해 있었다. 내 손에는 빛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지팡이 끝에는 펜던트와 똑같은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게… 뭐야?”
낯선 모습에 당황했지만, 몸을 가득 채운 충만한 힘은 나를 압도했다. 더 이상 무력하지 않았다. 이 힘이라면, 저 괴물에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소… 소리야…? 너… 너 누구야?”
은하가 경악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내가 변신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래, 나는 한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은하야, 괜찮아. 내가… 내가 널 지킬게.”
괴물은 잠시 멈칫한 듯했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훑어 내렸다. 의외의 방해꾼의 등장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이 힘을 감지한 것일까.
“크아아아악!”
괴물이 포효하며 거대한 발톱을 휘둘렀다. 그 속도에 내가 방금 전이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별빛 방패!”
푸른빛이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와 내 앞을 막아섰다. 빛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방패가 괴물의 공격을 막아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에 균열이 가는 것이 보였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크아아…”
괴물이 잠시 뒤로 물러섰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은하야, 괜찮아. 여기 있어. 내가 저 녀석을 막을게.”
“안 돼, 소리야! 위험해!”
나는 은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괴물에게로 향했다. 발목의 통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등 뒤의 날개가 나를 하늘로 이끌었다.
“이게… 날개?”
새로운 감각에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나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둠을 물리치는 별의 심장이여, 빛의 힘으로 응답하라! 스타라이트 크레센트!”
지팡이에서 강력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초승달 모양의 에너지 파동이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괴물은 이를 피하려 했지만, 속도가 느렸다. 푸른빛이 괴물의 몸에 명중했다.
“그아아아악!”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검은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완전히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괴물은 더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주변의 건물들을 마구잡이로 부수며 발버둥 쳤다.
나는 당황했다. 나의 공격이 이렇게 약할 리 없는데? 이 힘은 분명 강력했는데.
그때였다.
“그만해라.”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얼음 결정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묘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마치 붉은 달빛 아래의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 자락은 바람에 흩날렸고, 새하얀 피부는 붉은 달빛 아래서 더욱 창백하게 빛났다. 그의 머리카락은 은색이었고,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마치 깊은 밤하늘의 별을 담은 듯, 보라색 눈동자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괴물조차도 그를 의식한 듯, 잠시 몸을 멈췄다.
“저… 저 사람은 누구지?”
나는 그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는 나와 같은 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적일까?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났다. 안개는 빠르게 뭉치더니 날카로운 검의 형상을 띠었다. 암흑으로 이루어진 검이었다.
그가 움직였다. 그 순간,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빠르게 이동했다. 괴물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검은 이미 괴물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단 한 번의 움직임. 단 한 번의 공격. 괴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검이 괴물의 몸속으로 스며들자, 괴물의 몸은 마치 모래성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붉은 눈은 점점 빛을 잃었고, 거대한 몸은 검은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검은 안개 검을 거두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나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는 순간,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마치 작은 요정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시선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혹은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나의 비밀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싹함과 동시에 묘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위험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마치 붉은 달빛처럼,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나약한 힘으로 나서는 것은 어리석다.”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고 내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경고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몸을 감싸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변신이 풀리고, 나는 다시 평범한 한소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리야! 괜찮아?”
은하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은하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어… 응. 괜찮아.”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방금 전의 모든 일들이 꿈만 같았다. 내 손에 쥐어졌던 지팡이의 감촉, 몸을 감쌌던 빛의 온기, 그리고… 그 남자.
붉은 달빛 아래,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난 보랏빛 눈동자의 남자. 그는 누구일까.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나에게 던졌던 그 한마디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이제 내 삶은 더 이상 밋밋한 흑백 필름이 아니었다. 붉은 달빛처럼 강렬하고, 보랏빛 눈동자처럼 신비로운 색깔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은 오늘 밤, 이 붉은 달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알았다. 나의 평범한 일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알 수 없는 운명이, 그 보랏빛 눈동자의 남자와 깊이 얽혀 있으리라는 것을.
그의 얼굴이 자꾸만 잔상처럼 떠올랐다. 금지된 열매처럼 위험하고 아름다운, 그 보랏빛 눈동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