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늦은 오후는 언제나 회색빛이었다. 낡은 원룸 오피스텔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잿빛 빌딩 숲과 그 사이를 메우는 답답한 스모그, 그리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자동차 행렬뿐이었다. 이솔아, 서른을 바라보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는 이런 풍경에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작은 작업실 겸 생활 공간은 좁았지만 나름의 규칙과 질서로 채워져 있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어? 내 연필 어디 갔지?”

작업 중이던 태블릿 옆에 분명 놓아두었던 스케치용 연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솔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휙 둘러봤다. 책상 위, 서랍 속, 바닥…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새 연필을 꺼내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내가 또 칠칠치 못하게 굴었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그날 밤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늘 그렇듯 침대 머리맡 스탠드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은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런데 몇 초 후, 저절로 스탠드의 불이 다시 켜졌다. 솔아는 눈을 비볐다.

“뭐야? 스위치가 고장 났나?”

다시 불을 껐다. 잠시 후, 또 다시 불이 켜졌다. 그 행동을 세 번 반복하자, 스탠드는 마치 놀이하듯 제 멋대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솔아는 이제 섬뜩함을 느꼈다. 낡은 오피스텔이라 전기가 불안정한가 싶었지만, 이렇게 규칙적으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움직임은 처음이었다. 결국 스탠드의 코드를 뽑아버렸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엉뚱한 것이 그녀를 맞았다. 침대 발치에 벗어두었던 잠옷 바지가 똘똘 말려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어제 밤 분명 저 멀리 던져두었는데. 솔아는 몸을 일으켜 앉아 한참을 잠옷을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누가 들어왔었나?’ 하지만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때부터 기묘한 일들은 일상이 되기 시작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커피잔이 언제부턴가 싱크대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분명 닫아두었던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려 있거나, 반대로 열어두었던 문이 닫혀 있었다.
작업 중이던 스케치북이 책상 위에서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바람도 없었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심한 건, 냉장고였다. 한밤중에 ‘웅- 쉬익-‘ 하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더니, 아침에 보면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아니면 몽유병이라도 생겼나? 혹시 옆집에서 소음이 들리는 걸 착각하나? 갖가지 합리적인 의심들을 해봤지만, 결국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설명되지 않는 지점에 다다르자 솔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이거 폴터가이스트 아니야?”

어느 날 저녁, 그녀는 텅 빈 거실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마시던 뜨거운 허브차가 놓여 있었다. “있으면 좀 나와보던가. 매일 이렇게 장난만 치지 말고.”

그 순간, 테이블 위의 차 잔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솔아는 숨을 헙 들이켰다. 잔은 아주 천천히, 마치 손에 잡혀 올려지듯이 10센티미터 가량 떠올랐다가, 다시 조용히 제자리로 내려왔다.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솔아는 얼어붙은 듯 잔을 바라봤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오싹함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그리고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너… 누구야?”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잔이 올려졌던 그 미세한 공기에서, 어떤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부터 솔아의 아파트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상한’ 평화를 찾았다.

그녀는 이제 아침에 커피를 두 잔 내렸다. 한 잔은 마시고, 다른 한 잔은 식탁 한쪽에 놓아두었다. 이따금 그 잔이 비워져 있는 날도 있었다.

작업을 하다가 막히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영감이 좀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몇 분 후, 책상 위 어딘가에 놓여 있던 특정 색깔의 색연필이 스르륵, 하고 그녀의 손이 닿는 곳으로 굴러왔다.

솔아는 웃었다. “고마워. 이 색, 마음에 드네.”

빨래를 개다가 양말 한 짝이 사라지면, 굳이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았다. 잠시 후면 서랍 속에 고이 개어져 있거나, 침대 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물론 여전히 냉장고 문은 가끔 열려 있었고, 열쇠는 엉뚱한 곳에 놓여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솔아는 이제 그런 기이한 현상들을 짜증내기보다, 오히려 작고 소소한 일상적인 이벤트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작업도 잘 안 되고, 몸도 축 처져 우울해진 솔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야, 너 혹시 나 위로해줄 줄도 알아?” 그녀는 텅 빈 방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때, 방 안의 불이 깜빡였다. 두 번, 세 번, 천천히.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이.

솔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넓은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고, 정체도 모르는 기이한 존재가 그녀의 일상을 함께 채워주고 있었다. 그것은 때로 장난꾸러기였지만, 때로는 작은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왔다. 어둡던 방 안에서 스탠드 불빛이 스스로 스르륵 켜졌다. 부드러운 불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췄다. 솔아는 그 불빛 아래에서,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붓펜을 들어 스케치북에 작은 민들레 홀씨를 그렸다. 홀로 떠다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그녀의 기묘한 폴터가이스트와의 동거는 그렇게, 이 도시의 차가운 회색빛 속에서 그녀만의 따뜻한 ‘힐링’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