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솔골의 아침
따스한 햇살이 길게 늘어뜨려진 나무 그림자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늘솔골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아침을 맞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돌담길을 따라 이어졌고, 갓 구워낸 빵 냄새와 뜨거운 차를 내리는 향긋한 연기가 골목 어귀를 감돌았다. 아린은 자신의 작은 가게 ‘솔바람 뜨개방’ 문을 활짝 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숲의 신선한 내음과 마을의 온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 가득 채워지는 순간, 어쩐지 오늘 아침은 가슴 한 켠이 묵직했다.
“아린 아가씨, 좋은 아침!”
맞은편 떡집 아저씨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쟁반에 가득 담아 들고 나오며 환하게 웃었다. 늘솔골에서 가장 푸근한 인심을 자랑하는 양반이었다. 아린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도 좋은 아침이에요. 떡 냄새가 벌써 여기까지 나네요.”
“하하, 젊은 사람도 한 입 먹어야 힘이 나지. 이따가 따끈할 때 한 덩이 가져다줄 테니 맛 봐요.”
“감사합니다!”
아린은 떡집 아저씨의 온정 가득한 말에 가슴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늘솔골은 이렇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온기 위로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아린은 느낄 수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전날 마무리하지 못한 길쌈틀이 아린을 맞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명천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아린은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베틀의 씨실을 넘겼다. 톡, 톡, 톡. 규칙적인 소리가 고요한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만드는 천은 이 마을 사람들의 옷이 되고, 담요가 되고, 또 장에 내다 팔아 겨울 양식을 마련하는 밑천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제국에서 내려온 새로운 칙령은 늘솔골 사람들의 삶에 거대한 파문이었다. ‘제국 공물 강화 법안’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법안은, 각 마을에서 바쳐야 할 공물의 양을 터무니없이 늘렸다. 특히 무명천과 같은 수공업 품목은 그 부담이 배로 늘어, 늘솔골처럼 작은 마을은 그야말로 허리가 휘청일 지경이었다.
“아이고, 이걸 다 어떻게 해낸다니?”
어제 저녁, 마을 회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깊은 한숨과 근심이 가득했다. 할머니 순덕은 앙상한 손으로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지. 먹고 살 만은 했어. 그런데 이제는 하다 하다 못해 애들 새 옷 한 벌 해줄 천조차 아껴야 할 판이야.”
동식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쥐었다. 그는 늘솔골에서 가장 억척스럽게 농사를 짓는 청년이었다.
“이러다간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제국 놈들은 늘솔골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는 하는 겁니까?”
“알면 이렇겠니.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그저 진상할 물건을 만들어내는 도구일 뿐이지.”
아린은 그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베틀 위에서 바늘땀 한 땀 한 땀에 삶의 고단함을 엮어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평생을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제국이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공물을 바치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 성실함조차 죄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톡, 톡, 톡. 씨실이 넘어가는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아린은 문득 자신의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게 문가에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꼬마 정우였다. 늘 솔바람 뜨개방 앞을 지나갈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정우야, 안녕?”
아린이 부드럽게 말을 걸자, 정우는 배시시 웃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그는 손에 작고 예쁜 돌멩이 몇 개를 쥐고 있었다.
“누나, 이거. 예쁘지?”
정우는 조약돌을 아린에게 내밀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돌멩이들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아린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조약돌을 받아 들었다.
“응, 정말 예쁘다. 정우가 어디서 주웠어?”
“시냇가에서! 물고기들이랑 같이 있었어.”
정우는 물고기 흉내를 내며 손가락을 파닥거렸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아린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제국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뛰놀 수 있기를. 아린은 가슴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누나, 그런데 엄마가 이번 겨울에는 옷을 못 사준대. 천이 없어서.”
정우의 작은 목소리는 아린의 귀에 비수처럼 박혔다.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작은 그늘이 아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제국의 공물 강화는 이렇게, 가장 약하고 작은 생명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괜찮아, 정우야. 누나가 정우한테 딱 맞는 예쁜 옷 만들어줄 수 있어.”
아린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제국에 바쳐야 할 천의 양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공짜로 옷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자, 아린은 자신의 말을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거둬들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 와아!”
정우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순수한 기쁨은 아린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어쩌면 제국이 빼앗아 간 것은 비단 물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을 사람들의 미소와 희망이었다.
아린은 조약돌을 정우에게 돌려주며 따뜻하게 말했다.
“응, 정말이야. 대신 정우가 다음에 시냇가에서 더 예쁜 돌멩이 많이 주워다 줘야 해. 알았지?”
“응! 약속!”
정우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었고, 아린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맞대며 작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아이는 기분 좋게 뛰어갔다.
정우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아린은 베틀에 앉아 완성될 천을 바라보았다. 제국이 정해놓은 거대한 굴레 안에서, 늘솔골 사람들은 매일매일 숨 막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아이의 미소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여전히 이 마을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쩌면 저 작은 마음들이, 이 거대한 제국의 강철 같은 규칙을 조금씩 녹여낼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희망이 아린의 가슴을 채웠다.
아린은 길쌈틀의 씨실을 힘껏 당겼다. 톡, 톡, 톡. 이제는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 결연한 소리가 났다. 늘솔골의 아침은, 그렇게 조용한 각성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