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세계는 얇은 장막 한 겹 아래 잠들어 있었다. 차가운 금속성의 한숨이 깨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고, 현은 옆에서 불안하게 잠든 수진에게 낡은 담요를 더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밖의 도시 풍경은 한때의 영광을 잊은 채 뼈대만 남은 기념물 같았다. 하늘이 찢어진 날 이후로, 딱 삼 년째였다.

손에 들린 건조 식량 바를 확인했다. 절반. 그리고 수통 바닥에 깔린 흙탕물 같은 물 몇 모금. 턱없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현 오빠…” 수진이 칭얼거리듯 중얼거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희미하게 눈을 떴다. 마른 기침 소리가 가슴을 긁는 듯 났다.

“괜찮아?” 현은 조심스럽게 수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마른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목말라…”

그 말이 방아쇠였다. 움직여야 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곳이었다. 지난 이틀간 몰아쳤던 괴이한 모래바람은 그들의 임시 은신처마저 무너뜨릴 기세로 창문을 후려쳤고, 남은 식량은 이 어린아이를 하루조차 지탱하기 힘들 만큼 바닥나 있었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저 아래 골목에서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변이체가 아니었다. 뭔가 거대한 것이 기어 다니는 소리.

현은 낡은 배낭을 챙겼다. 녹슨 파이프 렌치가 유일한 무기였다. “일어나. 수진아. 가야 해.”
수진은 가늘게 떨리는 팔로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어디로 가? 오빠…”
“새로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현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수진의 불안한 눈빛이 그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예전에 엄마랑 가봤던 곳이야. 백화점. 지하에 식료품이 많았어.”

백화점. 영동 백화점.
한때 이 도시의 심장부였던 그곳은 지금은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로 통했다. 균열 이후, 이상한 소문들이 들려왔다. 건물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는 이야기.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그림자 손아귀’가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은 먼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잿빛 하늘 아래 도시는 거대한 폐허였다. 비틀린 금속 조각들과 부서진 아스팔트, 앙상한 뼈대만 남은 차량들의 숲. 현은 발소리를 죽이며 주변을 살폈다. 낮 동안에는 ‘그림자 손아귀’가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기습할 수 있는 ‘변이체’들이 있었다. 이빨이 너무 많아 흉측하게 비틀린 들개들, 칼날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

“이쪽이야.” 현은 수진에게 손짓했다. 수진은 간신히 그를 따랐다. 작은 배낭이 등 뒤에서 툭툭 부딪혔다.

길은 지옥 같았다.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을 아프게 했다. 곳곳에 널린 정체불명의 잔해들은 과거의 흔적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현은 수진의 눈을 가리고 빠르게 지나쳤다. 그런 것들을 보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빌딩들 사이를 지나다, 절반쯤 무너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환상의 라이브 콘서트!’ 빛바랜 글씨가 조롱하듯 걸려 있었다. 문득,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졸랐던 수진의 어린 시절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현은 재빨리 그 기억을 머리에서 지웠다. 지금은 과거를 추억할 때가 아니었다. 생존,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오빠, 저기… 뭔가 움직여.”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의 시선이 수진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거대한 폐기물 더미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찢어진 현수막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형체를 갖춰갔다. 왜곡된 인간의 형상. 그러나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머리에서는 뿔처럼 솟아난 뼈들이 날카롭게 뻗어 있었다. ‘그림자 손아귀’의 하급 변이체였다. ‘어둠의 사자’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숨어!” 현은 수진을 끌어당겨 무너진 버스 잔해 뒤에 숨겼다. “절대 소리 내지 마. 내가 처리할게.”
수진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파이프 렌치를 꽉 쥐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런 변이체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죽지 않았다. 빛에 약했지만, 낮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공포를 불어넣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림자 사자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이상한 진동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들은 실체가 없어. 날 죽일 수 없어.’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어둠의 사자가 버스 잔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로테스크하게 비틀린 얼굴이 현을 응시했다. 현은 무작정 파이프 렌치를 휘둘렀다. 쾅! 소리와 함께 사자의 형체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히려 더욱 깊어진 검은 기운이 현을 휘감는 듯했다.

‘도망쳐야 해!’ 현의 본능이 소리쳤다. 그는 수진의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수진아!”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폐가 찢어지는 듯 아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는 어둠의 사자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쫓아왔다. 현은 온 힘을 다해 폐허 속을 달렸다. 간판 기둥을 돌아, 무너진 건물 잔해를 뛰어넘어, 오직 백화점을 향해.

드디어 영동 백화점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심의 상징이었던 건물은 이제 공포의 상징이 되어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본래의 윤기 나던 외벽은 이제 군데군데 패여 있고, 창문들은 텅 빈 눈처럼 그들을 노려보는 듯했다. 정문은 무너진 잔해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현은 예전 기억을 더듬어 건물 뒤편의 서비스 입구를 찾아냈다.

녹슨 철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짙은 곰팡이 냄새와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깥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깊은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고요함이 그들을 짓눌렀다. 발소리만이 그 정적을 깨뜨렸다.

“여긴… 아무도 없네.” 수진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도 없어.” 현은 일부러 밝게 대답하며 손전등을 켰다. 하지만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백화점 내부. 한때는 화려했던 매장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진열대는 부서져 있고, 마네킹들은 기괴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벽에는 균열이 가 있었고, 천장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은 수진의 손을 꽉 잡고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에스컬레이터는 멈춰 선 채 녹슨 계단처럼 변해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현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곳의 공기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무겁고, 차갑고, 숨 쉬기조차 어려운 기분.

지하 1층, 식품 코너였다. 그러나 현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진열대는 뒤집혀 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썩어가는 음식물들의 잔해와 함께 정체불명의 검은 곰팡이가 벽과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여기… 정말 아무것도 없어.” 수진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현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아니, 분명 무언가 남아 있을 것이다. 대피소로 쓰였던 흔적은 없었지만, 혹시 깊숙한 창고 같은 곳이라면? 그는 손전등을 들어 구석구석 비추었다. 그때, 낡은 방화문이 눈에 들어왔다. ‘직원 전용’이라고 쓰인 글씨가 희미했다.

“저기다.” 현은 수진에게 말했다. “분명 저 안에 뭐가 있을 거야.”
방화문은 예상대로 잠겨 있었다. 현은 파이프 렌치를 들고 자물쇠를 부수기 위해 애썼다. 쿵, 쿵! 금속성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때, 지하의 깊은 곳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윽… 끄으으윽… 마치 거대한 생물이 숨 쉬는 듯한 소리였다.

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빠… 저 소리…”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현은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저 소리는 분명 ‘그림자 손아귀’ 중에서도 강한 개체, ‘어둠의 군주’의 울음소리였다. 공포를 먹고 자라는 존재. 현이 더 공포에 질릴수록, 그것은 더 강해질 터였다.

현은 모든 힘을 다해 파이프 렌치를 휘둘렀다. 쾅! 드디어 낡은 자물쇠가 부서져 나갔다. 삐이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안쪽은 더 깊은 어둠이었다. 현은 손전등을 비추었다. 오래된 창고였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자들이 가득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찾았다!”
저 안쪽 깊숙이, 낡은 선반에 쌓여 있는 통조림들과 병에 담긴 물들이 보였다. 비록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검은 연기 같으면서도 확고한 형체를 가진 거대한 존재. 어둠의 군주였다. 그 크기는 창고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고,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악몽 같았다.

“꺄악!” 수진이 비명을 질렀다.
공포가 현의 심장을 짓눌렀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둠의 군주는 그들의 공포를 흡수하며 더욱 거대해지고 있었다. 창고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도망쳐! 수진아!” 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지만 수진은 이미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있었다. 현은 파이프 렌치를 꽉 쥐었다. 상대는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그림자 존재.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현의 눈에 선반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낡은 소화기가 들어왔다. 빛… 어둠의 존재는 빛에 약하다. 그것도 강력한 빛에. 소화액은 빛을 반사한다. 그리고… 소화기는 터질 때 강력한 섬광을 일으킨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수진아! 눈 감아! 그리고 소리 지르지 마!”
현은 온 힘을 다해 소화기를 들었다. 무거웠지만, 지금은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둠의 군주는 거대한 그림자 팔을 뻗어 현을 향해 휘둘렀다. 현은 겨우 피했다. 차가운 공기 흐름이 그의 뺨을 스쳤다.

“죽어라!” 현은 소화기 안전핀을 뽑고, 어둠의 군주를 향해 노즐을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힘껏 눌렀다.
쉬이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얀 소화액이 거대한 압력으로 뿜어져 나왔다. 소화액은 어둠의 군주를 뒤덮었고, 그 순간 강력한 플래시 라이트를 비춘 듯 섬광을 터뜨렸다.

크으으아아악! 어둠의 군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거대한 그림자 형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소화액은 마치 염산처럼 그림자 몸체를 녹여버리는 듯했다. 어둠의 군주는 격렬하게 몸부림쳤고, 그 여파로 창고 안의 선반들이 쓰러졌다. 통조림과 물병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현은 비틀거렸다. 소화액 분사는 멈췄지만, 그의 팔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어둠의 군주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 크기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희미한 연기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잠시 후, 창고는 다시 고요해졌다.

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였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오빠… 괜찮아?” 수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제는 공포보다는 안도감이 엿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수진아.” 현은 수진을 끌어안았다. 살아남았다. 또다시.

바닥에 흩어진 통조림과 물병들을 보았다. 비록 엉망이 되었지만, 충분한 양이었다. 현은 미소 지었다. “이제 먹을 수 있겠다.”
수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진짜? 오빠!”
“그럼. 진짜지.”

그들은 창고 안쪽 가장 안전해 보이는 구석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현은 캔 따개를 이용해 통조림 하나를 땄다. 콩 통조림이었다. 오래되었지만, 부패하지는 않았다. 냄새를 맡고,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먹을 만했다.

수진은 허겁지겁 콩을 입에 넣었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배부름’이라는 감각에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은 물병 하나를 따서 수진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
수진은 물을 마셨다. 목마름이 가시는 상쾌함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창고는 그들에게 임시 거처가 되어주었다. 밤이 되자, 어둠의 군주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희미한 잔류 기운 때문인지, 이상한 환영들이 벽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과거의 백화점 모습, 사람들, 웃음소리… 현은 애써 무시했다. 그들의 공포를 자극하려는 심술궂은 장난에 불과했다.

수진은 현의 옆에 기대어 잠들었다. 현은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오늘은 살아남았다.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는 것. 그 단어는 이제 그들의 전부였다. 거대한 그림자 존재와 싸우고, 허물어져 가는 도시의 잔해 속에서 한 조각의 식량을 찾아 헤매는 매일.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며,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찾아왔다. 하지만 수진의 작은 숨소리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그를 붙잡았다.

밤은 깊어지고, 창고의 어둠은 그들을 삼키는 듯했다. 그러나 현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뛰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현은 낡은 파이프 렌치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은 다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