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속에서 빛나다
빌딩 숲을 비집고 솟아오른 달은 늘 잿빛이었다. 서울의 밤은 그 잿빛 달빛마저도 뿌옇게 희석시키는 조명들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나는 매일 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김민준, 서른셋. 번듯한 오피스텔에 살고, 제법 괜찮은 회사에 다니지만,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한 숫자들의 나열이었다. 야근, 회식, 주말엔 밀린 잠. 그게 전부였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자정 가까운 시간, 퇴근길 지하철은 이미 막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텅 빈 객차에 몸을 싣고 창밖의 어둠을 보는데, 문득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심지어는 밤의 풍경조차도 너무나 예측 가능하고 정형화되어 있다는 느낌. 뭔가 다른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오피스텔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려버렸다. 늦은 시간이라 택시도 잘 잡히지 않을 터였지만, 그냥 좀 걷고 싶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퇴근 후의 이 짧은 해방감이 내가 하루를 버티는 유일한 낙이었다. 늘 가던 큰 길을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낡은 상가 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은 가로등 불빛마저 흐릿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조금 으스스하기도 했지만, 익숙한 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골목 끝, 오래된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작은 공터 앞에서 옅은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흔한 네온사인이나 가로등 불빛과는 달랐다. 차분하고 은은하며, 마치 밤하늘의 별을 통째로 으깨어 뿌려놓은 듯한, 그런 영롱한 빛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공터 안에는 달랑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도시 개발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듯한,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굵은 느티나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처음 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빛의 근원이었다. 몸에서 별 부스러기 같은 은빛 가루가 희미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낡은 듯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풍스러운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맨발이었다. 맨발로 차가운 흙바닥 위에 서 있는데도,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주변의 공기는 희미하게 흔들리며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 느티나무의 거친 줄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보듬는 듯한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나무껍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퍼져 나갔고, 나뭇잎들은 밤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현실에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동시에 가장 비현실적인 풍경이기도 했다. 이 밤의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기이하고 신비로운 존재를 마주하다니. 꿈일까? 아니면 지독한 야근이 만들어낸 환각일까?
“누구… 세요?”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떨렸다.
내 목소리에 그녀의 손길이 멈췄다. 느리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리자, 나는 마침내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의 색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는 억겁의 세월이 스쳐 지나간 듯한 아득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너무나 강렬하고 투명해서, 마치 내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내 심장은 불안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외쳤다. 도망쳐야 한다고. 이 여인은 위험하다고.
하지만 발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 갇혀 버린 듯,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을 스치고, 어깨를 지나, 이내 내 뒤편의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돌아가세요.”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경고와 더불어 깊은 체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가라는 말인가? 그녀 자신으로부터? 아니면 이 이상한 밤의 광경으로부터?
그때였다.
골목 저편,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감정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속삭였다.
“밤이 깊어지고 있어. 당신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돼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느티나무 주변에 흩날리던 은빛 가루들이 갑자기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마치 작은 회오리바람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다.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더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로 눈을 가렸다.
눈을 다시 떴을 때, 공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없었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고,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은빛 가루도, 희미한 푸른빛도, 그 어떤 비현실적인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본 것은 환각일까? 피곤에 찌든 내가 만들어낸 헛것일까?
하지만 내 코끝에 남아있는 잔향은 너무나 생생했다. 흙냄새와 풀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달콤하면서도 아련한 꽃향기가 섞인 냄새. 그건 이 도시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지극히 자연적이고도 신비로운 향기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잿빛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사라진 곳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내 삶은 늘 예측 가능하고 정형화된 숫자들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규칙적인 배열 속에 알 수 없는 변수가 끼어들었다.
‘돌아가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방금 전, 그녀의 눈빛에 담겨 있던 아득한 슬픔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두려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는 듯한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것들은 더 이상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새로운 밤의 흔적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녀가 서 있던 느티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나무껍질에 손끝이 닿았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손바닥 아래로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무엇을 넘어서는 안 되는지 알지 못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그녀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고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나비가 거부할 수 없는 꽃의 향기를 쫓듯이.
이제 나의 밤은 더 이상 잿빛 달 아래의 평범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어떤 존재를 향한,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갈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갈망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전혀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