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인연: 은빛 숲의 그림자

엘드리움 숲은 태초의 신비와 고요를 간직한 거대한 생명체와도 같았다. 굽이치는 나무줄기마다 푸른 이끼가 섬세하게 피어올랐고,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마치 오래된 전설을 속삭이는 듯했다. 숲의 깊은 곳, 은빛 안개가 상시 맴도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자리한 엘드리움 종족의 마을은 늘 평화로웠다. 이곳은 생명의 힘이 가장 강하게 흐르는 곳이었고, 이슬리아는 그 힘을 빌어 병들고 다친 존재들을 치유하는 자였다.

이슬리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숲의 기운을 느끼며 작은 잎사귀 하나를 어루만졌다.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숲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언제나 희미한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북부의 카르나크 부족과의 전쟁은 엘드리움 숲의 평화로운 심장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카르나크족은 강철의 심장을 가진 야만적인 전사들이었고, 그들의 피는 오직 파괴와 정복만을 갈망한다고 믿어졌다. 엘드리움 족은 그들을 ‘흉포한 짐승’이라 불렀고, 카르나크 족은 엘드리움 족을 ‘나약한 숲의 요정’이라 비웃었다. 두 종족 사이에는 어떤 교류도 허락되지 않았고, 오직 경계와 증오만이 존재했다.

“오늘은 저편으로 너무 깊이 가지 마렴, 이슬리아. 경계가 불안정하다는 소식이 있어.”

어머니인 에아리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숲의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숲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다. 금지된 땅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들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오직 피에 굶주린 존재일까? 그녀의 치유의 손길은 종족을 가리지 않았다. 숲의 작은 동물들이든, 우연히 다친 엘드리움 전사들이든, 그녀에게 생명은 오직 생명일 뿐이었다.

오늘따라 숲의 기운이 어수선했다. 멀리서 풍겨오는 쇠와 피 냄새는 엘드리움 숲에서는 맡을 수 없는 불쾌한 것이었다. 이슬리아는 혹시 숲의 요정들이 다쳤을까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계를 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 일이었으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숲의 고통이 우선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거대한 그림자였다. 울창한 덤불 아래, 짙은 흙먼지와 핏물로 얼룩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 카르나크 전사였다.

이슬리아는 숨을 멈췄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카르나크족은 전쟁터에서 마주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얼굴이거나, 어미의 품에서 겨우 벗어난 새끼 늑대처럼 움츠러든 포로들의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의 몸은 검은색 가죽과 투박한 금속으로 된 갑옷에 싸여 있었고, 굵은 근육은 팽팽하게 긴장한 채였다. 거친 수염이 뒤덮인 얼굴은 흙과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깊게 파인 상처들 사이로 보이는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허벅지에 깊게 박힌 검은색 깃털 달린 화살이었다. 화살 주변의 피부는 검붉게 부어올라 독이 퍼지고 있음을 알렸다.

그는 분명 적이었다. 그녀의 종족에게 수없이 많은 상처를 안겨준, 저주받은 카르나크 부족의 전사.
하지만 동시에, 그는 죽어가는 생명이었다. 숲의 모든 생명은 치유받을 가치가 있었다.

이슬리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성적인 목소리는 위험하다고 속삭였다. 만약 다른 이들에게 발각된다면, 그녀는 부족의 법도를 어긴 죄인이 될 터였다. 그는 깨어나면 그녀를 해칠지도 모르는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의 생명 에너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치유하라.’ 그녀의 손끝이 저절로 떨려왔다.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다행히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다가섰다. 발걸음은 가볍지만 조심스러웠다.

가까이 다가가자, 카르나크 전사의 거친 숨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몸에서 풍겨오는 흙먼지와 땀, 그리고 피 냄새가 섞인 야성적인 냄새가 이슬리아의 코를 자극했다. 그녀는 작은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살며시 얹었다. 뜨거웠다. 고열로 인해 그의 피부는 불덩이 같았다.

“젠장….”

그녀의 손길에 남자가 희미하게 신음하며 눈을 살짝 떴다. 핏줄이 선 검붉은 눈동자가 이슬리아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혼미함 속에서도 야수와 같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이슬리아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더 나빠질 거예요.”

이슬리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남자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미약한 혼란과 함께 체념의 기색이 비쳤다. 그는 그녀를 밀쳐낼 힘조차 없었다.

이슬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허리춤에 매단 작은 약초 주머니를 풀었다. 독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화살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독이 묻은 화살촉은 살 속에 깊이 박혀 있었고, 억지로 빼면 더욱 큰 상처를 남길 터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뻗어 화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피부에 숲의 치유 에너지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희미한 은빛 기운이 그녀의 손끝에서 발현되어 남자의 상처 부위를 감쌌다.

카르나크 전사는 고통스러운 듯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 근육이 비틀렸지만, 그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슬리아는 그의 인내심에 놀랐다. 과연 강철의 심장을 가졌다고 불릴 만한 강인함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도울게요.”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화살 주변의 근육이 조금씩 이완되고, 독으로 인해 부어오른 살결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슬리아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한 손으로 화살대를 강하게 붙잡고 다른 손으로 상처 주변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숨에 화살을 뽑아냈다.

크아악!

남자의 입에서 참았던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경련하며 흙바닥에 박혀 있던 돌을 움켜쥐었다. 이슬리아는 뽑아낸 화살을 던져버리고는 곧바로 상처에 해독 효과가 있는 약초를 짓이겨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온 영혼을 다해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은빛 빛줄기가 상처 위로 흘러내리며 독을 중화시키고 지혈을 도왔다. 깊었던 상처는 놀랍도록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부족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커다란 몸이었다. 이대로는 그를 옮길 수 없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적당한 크기의 빈 동굴을 발견했다. 숲의 안쪽 깊숙이 숨겨진 곳이었다.

“제가… 제가 옮겨야 해요.”

이슬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카르나크 전사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하고, 자신의 가느다란 허리를 그의 허리에 받쳤다. 그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몸을 동굴로 끌고 갔다. 거친 돌길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겨우 동굴 안쪽에 그를 눕히자, 이슬리아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그는 다시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그녀는 그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독은 거의 해독된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슬리아는 동굴 밖으로 나가 숲속의 맑은 샘에서 물을 길어왔다.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물에 적신 뒤,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와 얼굴, 그리고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차가운 물이 닿자, 그의 얼굴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얼굴을 스치자, 흙과 피에 가려져 있던 그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인한 턱선, 오뚝한 콧대, 그리고 눈썹 아래 깊이 박힌 몇 개의 흉터들. 야성적이지만 동시에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특히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고통과 인내심을 웅변하는 듯했다.

이슬리아는 무심코 그의 뺨에 남은 작은 흉터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차갑고 거친 피부의 감촉이 그녀의 손끝에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그녀의 종족에게 ‘괴물’이라 불렸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상처받은 하나의 생명일 뿐이었다.

바깥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숲의 모든 소리를 삼키는 듯한 빗소리가 동굴 입구를 때렸다. 고요한 동굴 안, 이슬리아는 고열로 신음하는 카르나크 전사 곁에 앉아 불안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가장 금지된 인연의 끈을 스스로 엮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끈이 어떤 운명을 가져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