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저의 속삭임
“이런, 또 삐끗이잖아!”
류진은 코어 반응로 시뮬레이션 화면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최첨단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위에서 마나 코어의 에너지 흐름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다 결국 붉은색 경고 메시지와 함께 파동 그래프가 산산조각 났다. 빌어먹을.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실패였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 ‘신비 공학부’ 3학년의 과제치고는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건 그냥 고장 난 마나 코어를 재보정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창밖으로 찰랑이는 호수와 그 위로 떠오른 여러 연구동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류진이 있는 ‘에테르 연구동’은 학원 구석에 박혀 있어 다소 한적한 편이었지만, 여전히 거대한 마법 학원의 일부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웅장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 평화로운 풍경 대신, 시스템 진단 모듈이 띄운 심층부 센서 기록에 고정되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알 수 없는 노이즈가 계속해서 감지되고 있었다. 학원의 메인 마나 컨두잇 시스템은 완벽한 정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가끔씩 아주 미묘한 진동이 감지되곤 했다. 처음엔 단순한 센서 오류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동은 마치 리듬을 타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류진은 인덱스 패드를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빠르게 스크롤했다. 학원 내부망 지도에 표시된 지하 층수는 고작 15층이 전부였다. 그러나 센서 기록에 찍히는 깊이는 그보다 훨씬 더 아래였다. 데이터는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잘라낸 듯, 15층 이하의 기록은 ‘알 수 없음’ 또는 ‘접근 금지’라고만 표시되어 있었다.
“이상하잖아….”
그는 이내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이 미묘한 호기심은 그를 가만히 두지 못하게 했다. 이런 류의 일에는 본능적으로 끌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학원 복도를 따라 걷자, 벽면에 설치된 크리스탈 등불들이 마나 흐름에 따라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그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목적지는 ‘고대 기록 보관실’이었다. 학원생들에게는 거의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었지만, 가끔씩 오래된 자료를 찾거나 교수님들의 심부름을 온 학생들이 눈에 띄곤 했다. 류진은 그곳에서 늘 홀로 책을 뒤적이는 이세하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학원의 살아있는 고서와 같았다.
기록 보관실의 거대한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고색창연한 서가의 풍경이 펼쳐졌다. 홀로그램으로 된 정보 패널 대신, 빼곡하게 꽂힌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와 두꺼운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가장 구석진 곳, 홀로그램 램프 하나만을 벗 삼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세하가 보였다.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낡은 종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세하야!”
류진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늘 차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류진? 무슨 일이야. 여긴 올 일이 없을 텐데.”
그녀의 말투는 평소처럼 무덤덤했지만, 미세하게 흐트러진 눈빛에서 놀라움이 엿보였다. 류진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가 지금 너한테 딱 맞는 이상한 걸 발견했거든.”
그는 인덱스 패드를 내밀었다. 세하는 잠시 류진을 보더니, 이내 패드를 받아들어 화면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썹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이건… 학원 지하 심층부 마나 컨두잇의 미세 파동 기록이군. 그리고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이 불규칙적인 노이즈는….”
“센서 오류라고 하기엔 너무 규칙적이야. 게다가 심도도 학원 공식 지도에 없는 곳에서 감지되고 있어.”
류진의 말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의 손목에 찬 링크 패드를 조작했다. 홀로그램 스크린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오래된 아르카나 학원 설립 당시의 설계도가 투영되었다.
“설립 당시 기록에는, 지금의 지하 15층 아래로 ‘무한의 심연(Abyss of Infinity)’이라는 이름의 구역이 존재한다고 되어 있었어.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구역은 설립 직후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고 공식적으로 ‘폐쇄’ 처리되었지. 그 후로는 누구도 그곳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세하의 말에 류진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 공간이라니.
“폐쇄? 왜? 대체 뭐가 있었길래?”
“기록은 불완전해. 단편적인 언급으로는, ‘끔찍한 금기’와 관련된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너무나도 위험했기에 모든 것을 봉인했다고만 쓰여 있어. 그리고 메인 마나 컨두잇은 사실 그 ‘금기’를 억누르기 위한 봉인 장치의 일부라는 소문도 있었어.”
그녀가 가리킨 설계도에는 학원 전체를 지탱하는 거대한 마나 컨두잇의 흐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의 가장 깊은 곳, 학원 지하 가장 낮은 곳에서 거대한 에너지의 중심으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가둬두고 그 에너지를 이용해 억누르는 것처럼.
“소문이 진짜였다면, 지금 네가 감지한 이 노이즈는… 그 ‘금기’가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
세하의 차분한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류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학원 측에 보고한다고 해도, 그들은 아마 우리를 미친놈 취급하거나, 아니면 더 심한 조치를 취할 거야. 이런 류의 ‘금기’는 대개 권력층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관리되는 법이지. 우리가 직접 확인해야 해.”
그녀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담겼다. 류진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비밀의 조각을 들여다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좋아. 그럼 어떻게 들어갈 건데? 지하 15층 아래는 완전 봉쇄구역이잖아.”
“메인 통제실은 경비가 너무 삼엄해. 하지만 기록 보관실에 폐기된 오래된 설비도를 보면, 과거에는 비상용으로 사용되던 보조 통로가 있었어. 지금은 완전히 막혔다고 하지만….” 세하의 눈이 빛났다. “막혔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 단지 접근하기 어려울 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서가 사이를 빠르게 이동했다. 이내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내용을 살폈다.
“이거야. 구내 하수처리 시스템의 가장 오래된 라인. 마나 정화 필터 교체를 위해 외부 인력이 드나들던 곳인데, 학원 재정비 이후 완전히 폐쇄되었어. 경비 시스템이 연동되지 않는 맹점이지.”
“하수처리 시스템이라니… 냄새 지독하겠는데.” 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어.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한 우회로니까.”
밤이 깊어지고, 학원 전체가 고요한 잠에 빠져들었을 때, 류진과 세하는 어두운 지하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파이프와 축축한 곰팡이가 가득했다. 예상대로 지독한 하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둘 다 내색하지 않았다.
오래된 하수 처리 터미널에 도착하자, 세하는 휴대용 패드로 주변의 마나 잔류량을 측정했다.
“이 근처는 마나 흐름이 거의 없어. 과거의 봉인 마법이 완전히 소멸된 모양이야.”
“그럼 해킹은…?” 류진이 손에 든 인덱스 패드를 들어 올렸다.
“내가 기록에 남겨진 봉인 패턴을 분석해볼게. 류진은 이 오래된 제어 패널을 우회해봐. 학원 메인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지 않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야.”
류진은 능숙하게 낡은 제어 패널을 열어 내부 회로에 자신의 패드를 연결했다.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먼지투성이 회로망 사이로 그의 패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세하의 패드에서도 고대 문자 패턴이 빠르게 스크롤되며 봉인 마법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거의 다 됐어…!” 세하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살짝 떨렸다.
그때, 터미널 깊은 곳에서 섬뜩한 진동이 울렸다. 류진의 패드 화면에 나타난 마나 파동 그래프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 아까 감지했던 미세한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강력하고 불길한 에너지였다.
“크윽…! 이건…!”
류진의 손에 들린 패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류진! 서둘러!”
세하의 외침과 동시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봉인 마법이 해제되었다. 류진 역시 마지막 접속 코드를 입력하고 패널을 닫았다. 낡은 금속 문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들 앞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다. 어둠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지하 공간은 기괴하고 희미한 붉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빛은 벽면을 따라 흐르는 복잡한 회로 같은 것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빛의 중심에, 믿을 수 없는 규모의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규칙적으로 쿵, 쿵 하고 박동하고 있었다.
그 구조물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온몸을 휘감은 금속 파이프와 케이블, 그리고 그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 마법 문자들이 뒤섞여 끔찍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주변 공간의 공기 자체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건… 대체….” 류진의 입에서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와 경외심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금기’… 이것이 학원 지하에 숨겨진… 진짜 금기였어….”
그때였다. 거대한 구조물의 중심에서,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하게 폭주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치 영겁의 잠에서 깨어난 듯한, 섬뜩하고 낮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절규였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끔찍한 굶주림의 외침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의 등 뒤에서, 방금 들어왔던 낡은 문이 ‘끼이익’ 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닫히기 시작했다. 완전히 갇혔다.
“젠장…!” 류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붉은빛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기괴하게 뒤틀리고, 마치 수억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악몽이 현실로 발현된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그것의 거대한 붉은 눈동자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