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푸른 그림자 속 핏자국
청허궁.
구름과 안개 속에 잠긴 듯, 영롱한 기운이 서려 있는 선계의 한 자락이었다. 지상에서 아득히 떨어진 그곳은 시간마저도 희미하게 흘러가는 듯한 평온함으로 가득했다. 푸른 비단 같은 하늘 아래, 백옥처럼 빛나는 전각들이 봉우리마다 우아하게 솟아 있었고, 맑은 영기가 바람을 타고 불어와 수행자들의 마음을 씻어냈다.
하지만 오늘, 청허궁의 평온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천 년 묵은 신령한 소나무 아래, 운선자의 거처인 ‘무영각’ 앞에 모인 선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무영각은 청허궁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기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외부의 침입은커녕, 내부의 기운조차 함부로 새어나가지 못하게끔 설계된 선계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청허궁의 최고 어른 중 한 분인 운선자께서 시신으로 발견되셨다니.
“대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청허궁의 수장, 현무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푸르게 질려 있었고, 굳게 닫힌 무영각의 문을 바라보는 눈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이 가득했다.
“문은 여전히 결계로 봉인되어 있습니다. 운선자께서 생전에 직접 시전하신 봉인이었으니, 그 어떤 이도 억지로 열 수 없을 터인데… 대체 누가 그 안으로 들어갔단 말입니까!”
옆에 서 있던 백발의 선인, 청풍진인이 허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의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음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영각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문과 창문은 운선자 본인이 아니면 해제할 수 없는 강력한 영기 결계로 봉인되어 있었고, 건물의 벽면은 오로지 선계의 특수한 백옥석으로 지어져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지상에선 밀실 살인이라 불릴 만한 이 상황은, 선계에서만큼은 ‘불가능한 살인’ 그 자체였다. 영력이 아무리 강한 선인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완벽하게 봉인된 공간에 침입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운선자는 청허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으니, 설령 침입자가 있었다 해도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채 혼돈에 빠져 있을 때였다.
무영각으로 향하는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한 줄기 그림자가 유유히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느릿했고,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검은 도포를 입은 모습은 왠지 모르게 주변의 긴장감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그의 백옥 같은 얼굴은 여유로웠고, 살짝 휘어진 눈매는 이 모든 소란을 먼 산 보듯 관조하는 듯했다.
그가 다가오자, 현무진인의 눈에 겨우 희망의 빛이 서렸다.
“백야 진인! 드디어 오셨습니까!”
현무진인이 거의 달려가다시피 그를 맞이했다. 백야. 그는 청허궁의 어느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수행만을 일삼는 기인이었다. 그의 영력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지만, 그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바로 그의 지혜였다. 선계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들, 아무도 풀지 못했던 미스터리들이 그의 손에서 허망하게 풀려나곤 했다. 사람들은 그를 ‘영력을 가진 지상의 탐정’ 혹은 ‘선계의 명탐정’이라 불렀다.
백야는 현무진인의 다급한 얼굴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많은 선인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다니,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겠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동요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운선자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무영각 안에서…!” 현무진인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허나 문제는… 무영각은 결코 뚫을 수 없는 밀실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모두 누가 범인인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습니다.”
백야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그가 놀랐다는 것이 아니라, 흥미를 느꼈다는 유일한 신호였다.
“밀실이라… 재미있군요.”
그는 짧게 중얼거리고는 무영각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시선은 먼저 문에 새겨진 정교한 영기 결계를 훑었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결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견고했다.
“문은 운선자께서 내부에서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외부에서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청풍진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백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영각의 외벽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선계의 백옥석은 매끄럽고 단단했으며, 어떤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이어 그는 무영각을 둘러싼 주변의 소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울창한 소나무들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발견 당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백야가 물었다.
현무진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아침에 운선자의 제자인 소월이 평소처럼 차를 올리러 갔습니다. 헌데 문이 열리지 않아 몇 번이고 운선자를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불안감을 느낀 소월이 제게 달려와 이 사실을 알렸고, 저희가 와서 문을 강제로 열려 시도했으나… 이 결계는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희는 결계를 잠시 무력화시킨 뒤 문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 운선자께서는…”
현무진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떨렸다.
“운선자께서는 자신의 수행단상에 앉은 채, 가슴에 선혈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영력이 고갈된 듯, 선기마저 소실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방 안에는 그 어떤 침입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흐트러진 물건 하나 없었고, 그 어떤 투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밀실 그 자체였습니다.”
백야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무영각의 외벽과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섬세하게 움직였다.
“누구라도 좋으니, 안을 자세히 묘사해 보십시오.”
소월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방 안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중앙에는 운선자께서 늘 앉으시던 수행단상이 있었고, 그 옆에는 맑은 영기를 담아두는 영수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벽에는 영험한 산수화가 걸려 있었고,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습니다. 침입자가 숨을 만한 곳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선자님의 가슴에는… 마치 단검 같은 것에 찔린 듯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 안에는… 어떤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백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보였다.
“영수병의 뚜껑은 닫혀 있었습니까?”
그의 질문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살인 사건과 영수병 뚜껑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늘 그러셨듯이 말이죠.”
백야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무영각의 견고한 외벽을 훑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비웃음도, 놀라움도 아닌,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의 만족감 같은 미소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청허궁의 산자락에 울려 퍼졌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무영각은… 결코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밀실은 맞지만, 범인은 이미 그 안에 있었습니다.”
현무진인의 얼굴이 혼란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야 진인? 범인이 이미 안에 있었다니요? 그렇다면 운선자와 함께 밀실에 갇혀 있었다는 말인데…”
백야는 빙긋 웃었다.
“범인은 단 한 번도 무영각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의 시선이 무영각의 외벽을 따라, 푸른 하늘로 향했다.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는 듯했다.
“단지… 형체가 없었을 뿐이죠.”
그의 마지막 말이 청허궁을 덮쳤다. 선인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형체가 없는 범인이라니,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러나 백야의 눈빛은 이미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본 듯, 확신에 차 있었다.
밀실은 깨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