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고요한 밤, 지훈의 좁은 원룸에는 오직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와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게임 배경음악만이 가득했다. 밖으로는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지만, 그에게는 마치 겹겹이 쌓인 차단막처럼 느껴졌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유일한 안식처인 가상현실 속으로 도피하는 것. 그것이 지훈의 일상이었다.

그가 접속해 있는 게임은 ‘이계의 조각’이라는 이름의 VRMMO였다. 거대한 파편화된 세계를 탐험하며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는 것이 주된 목표인 게임. 어둠에 잠긴 폐허 도시, 기괴한 형상의 구조물들이 즐비한 필드는 지훈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휴… 오늘도 영혼까지 갈아 넣었네.”

지훈은 길드원들과 함께 희귀 아이템 사냥을 마친 후, 가상현실 속 자신의 아바타를 ‘고요한 안식처’라는 이름의 인게임 하우징에 세워두었다. 가상현실 속 집은 현실의 좁은 원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이와 안락함을 자랑했다. 그는 헤드셋을 벗지 않은 채, 길드 채팅창에 피로가 묻어나는 메시지를 남겼다.

[지훈쓰고갈기 :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저 좀비 됐어요.]
[예나숲 : 지훈님도 수고하셨어요! 내일 또 뛸 거죠?]
[지훈쓰고갈기 : 물론이죠… 내일 보자구요.]

그때였다. 현실의 방 안에서,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무의식적으로 헤드셋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방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래된 전등 스위치가 켜지는 듯한, 아니면 얇은 플라스틱이 부러지는 듯한 소리.

‘뭐지? 옆집인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아파트는 워낙 노후되어 밤마다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헤드셋을 다시 고쳐 쓰고 게임 속으로 완전히 몰입하려던 찰나, 시야 한구석이 움찔거렸다. 인게임 하우징의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순간적으로 일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 것이다. 마치 화면이 미세하게 깨지는 것처럼.

“버그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계의 조각은 최적화가 잘 된 게임으로 유명했다. 이런 그래픽 버그는 흔치 않았다.

다음 날, 지훈은 어김없이 퇴근 후 게임에 접속했다. 어제 액자가 흔들리던 버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안심하고 다시 몰입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헤드셋을 착용한 채로 그의 옆에 놓아두었던 물컵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컵 속의 물이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파동을 일으켰다.

‘…지진인가?’

하지만 건물은 고요했고, 아무런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컵의 진동은 몇 초 이어지다 멈췄다. 지훈은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애꿎은 게임 패드를 꽉 쥐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현상에 지훈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퇴근 후 아파트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왠지 모를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텅 빈 복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착각, 새벽녘에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속삭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열쇠꾸러미…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했던 것들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져갔다.

“젠장,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감에 현실의 아파트를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이계의 조각’에 접속하기로 했다. 적어도 가상현실 속에서는 이런 불쾌한 기분을 잊을 수 있을 테니.

헤드셋을 착용하고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서자, 폐허가 된 도시의 밤하늘이 그를 맞았다. 으스스하지만 익숙한 풍경. 그는 길드 거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어두운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나숲 : 지훈님! 이제 오셨네요!]
[지훈쓰고갈기 : 어… 어.]

예나의 활기찬 목소리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게임 속 아바타처럼 굳어 있었다.

“어라? 지훈님, 저기… 그 건물 왜 저래요?”

예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까지 지나쳤던, 멀쩡했던 건물의 외벽이 마치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깨져 있었다. 텍스처 오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현실적인 균열이었다. 균열 사이로 보이는 내부 공간은 이계의 조각답게 어둡고 황폐했지만, 어딘가 낯익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내 방?’

그 순간, 지훈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깨진 건물 외벽 사이로 보이는 공간은, 놀랍게도 그의 현실 속 아파트 거실과 흡사했다. 창문, 심지어 그가 아끼는 낡은 소파의 형태까지도.

“지훈님! 갑자기 뭐 하세요?”

예나의 당황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훈은 그 깨진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파편화된 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은 더 이상 ‘이계의 조각’의 폐허가 아니었다. 낡은 컴퓨터 모니터, 널브러진 과자 봉지, 그리고 자신이 잠시 벗어두었던 헤드셋이 놓인 책상. 완벽하게 그의 원룸이었다. 단지 모든 것이 극도로 왜곡되고 낡고 부서진 형태로 존재할 뿐.

“아니… 이게 대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게임의 혼재는 그를 패닉에 빠뜨렸다. 그때, 거실 한구석에 놓인 옷장 문이 스르륵, 하고 스스로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현실의 지훈의 귀에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옷장 안에서, 어둠에 잠긴 채 무언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마치 물결처럼 움직이며 지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림자의 중심에서는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훈… 지… 훈…”

가상현실 속의 아바타는 굳어 버렸다. 현실의 지훈은 손을 덜덜 떨며 헤드셋을 벗으려 했다. 그러나 헤드셋은 마치 그의 머리에 단단히 고정된 것처럼 벗겨지지 않았다.

“젠장! 벗겨져! 벗겨지라고!”

그는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헤드셋 안에서만 맴돌았다. 게임 속의 옷장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지며,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듯이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현실의 방 안에서도 같은 옷장에서 ‘끼이이익-‘ 하는 끔찍한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계의 조각 속에서 지훈을 노려보는 그림자와, 현실의 지훈을 향해 열린 옷장 문 사이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헤드셋을 통해 들려오는 그림자의 속삭임은 점점 더 커져, 이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처럼 들렸다.

“이제… 영원히… 함께…”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의 신경이 짜릿한 공포로 마비되는 듯했다. 눈을 뜨면, 과연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낡은 아파트의 침대 위일까, 아니면 파편화된 이계의 조각 속일까? 아니면… 그 둘이 섞인,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일까.

그의 눈앞은 새까만 어둠으로 잠겼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딸깍’ 하는 전등 스위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