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흉터처럼 솟아오른 회색 아파트 숲 사이, 그중에서도 유독 평범해 보이는 한 동의 14층에 김민준은 살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그는 프리랜서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 낮에는 웹소설 연재 플랫폼에서 계약직 편집 업무를 보며 생계를 유지했고, 밤이면 캔버스 대신 액정 태블릿 위에서 자신의 꿈을 그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삶은 규칙적이고, 소박하며, 그래서 더욱 예측 불가능한 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그 일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려는데, 분명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컵이 싱크대 옆에 놓여 있었다.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튿날 아침, 침대 옆 협탁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엉뚱하게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액정은 멀쩡했지만, 민준은 슬슬 찜찜함을 느꼈다.

“뭐야, 내가 술 마시고 집어던졌나?”

하지만 그는 전날 밤 맥주 한 캔조차 마시지 않았다.

사건들은 점점 기묘해졌다. 분명 닫아두었던 창문이 활짝 열려있어 거실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거나, 밤중에 전등이 저절로 깜빡이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화장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한참을 애를 먹기도 했다. 민준은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침입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현관문 잠금장치는 멀쩡했고, 어떠한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관은 피곤한 얼굴로 민준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들에 민준은 불안에 떨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그의 작업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텅 빈 방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의 액정 태블릿이 혼자 켜져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빠르게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섬뜩함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귀신인가? 민준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영적인 현상을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미쳐버리겠어.”

그는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서 혼자 잠들 수 없었다. 주말마다 본가로 도망치듯 향했고, 평일 밤에는 친구 집에 얹혀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간 아파트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현상은 더욱 격렬해져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이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린 채 음식물들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밤, 민준은 용기를 내어 밤샘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마감이 코앞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적막이 흐르는 아파트에,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가더니, 그의 어깨를 누군가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흐읍!”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엎어진 채 뒤를 돌아보니, 텅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 희미하게 빛나는 반투명한 형체가 서 있었다. 그것은 얼핏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흐릿한 윤곽 속에서 낡고 오래된 비단 옷자락이 나부끼는 듯했고,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감정이 짙게 서려 있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민준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떨렸다. 형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더니, 민준의 앞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희미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고어(古語)로 중얼거렸다.

“눈부신 기계덩어리… 요망한 소음…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형상…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이 존재는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워하는 것뿐이었다.

“저… 저건 컴퓨터에요. 제가 이걸로 일을 해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설명했다. 형체는 민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아파트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이 돌덩어리 같은 상자들이 하늘을 찌르고… 속에는 이토록 시끄럽고 어지러운 기운들이 가득하니… 어찌 편히 쉬란 말이냐.”

점점 선명해지는 목소리에 민준은 놀랐다. 고어는 현대 한국어와는 달랐지만, 묘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는 듯했다. 이 존재는 아파트를 이루고 있는 콘크리트 숲과 현대 문명의 소음, 전자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파 등을 불편해하는 듯 보였다.

“당신은… 대체 누구세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형체는 한숨을 쉬듯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잊혀진 자. 이 땅의 기맥을 지키던 미천한 신선이었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기억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지. 헌데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른 이 거대한 돌산들이 나의 잠을 깨웠고, 나의 거처 위에 요란한 기운들을 쏟아내더구나.”

신선이라니. 민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웹툰이나 웹소설에서나 보던 설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 당신이… 그동안 제 물건들을 움직이거나… 했던 건…?”

“나는 그저 너희가 만든 이 기이한 상자들과 요란한 소음, 눈을 어지럽히는 빛에 짜증이 나서… 조용히 해달라고, 혹은 사라져 달라고 했을 뿐이다. 너희 인간들은 어찌 이리 둔한지, 나의 기운조차 알아채지 못하는구나.”

신선은 투명한 손으로 민준의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은 둥둥 떠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식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민준은 경악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고작 이 신선님의 ‘조용히 해달라는 투정’이었다니.

“죄송합니다, 신선님… 제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 살아야 하고, 일도 해야 해서…”

“시끄럽다. 네놈의 시끄러운 작업은 나의 기운을 흩트리고, 저 번쩍이는 상자들은 나의 눈을 아프게 한다. 이 아파트는, 정확히 말하면 이 자리는, 과거 이 일대의 영험한 기운이 모이던 곳. 나는 그 기운을 다스리며 잠들어 있었으나, 너희의 탐욕스러운 건설이 나의 잠을 깨웠을 뿐더러, 내 거처를 부수고 그 위에 이런 철근과 시멘트 덩어리를 쌓아올렸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느냐!”

신선의 투명한 몸체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분노가 느껴지는 영적인 기운에 민준은 저절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진정하세요, 신선님! 제가 어떻게든 조용히 해볼게요! 정말이에요!”

민준은 필사적으로 빌었다. 신선은 한참 동안 민준을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내 기운은 약해져서, 너희의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저 한탄스러울 뿐. 하지만 네놈이 나의 심기를 더 이상 거스르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리 지내보자꾸나.”

그렇게 민준과 신선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민준은 작업실 한켠에 작은 상을 차려 조용한 향을 피우고, 맑은 물과 제철 과일을 올려두었다. 신선은 그 공간을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삼았는지, 그 주변만큼은 기이한 현상들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신선은 여전히 현대 문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민준이 밤늦게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 그 헤드폰이 민준의 귀에서 홀연히 사라져 공중을 유영하곤 했다.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며 깔깔 웃는 소리에는 민준의 폰이 벽으로 날아가 박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은 민준이 밤샘 작업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투명한 손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저 번쩍이는 상자에 매달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잠은 자야 할 것 아니냐.”

신선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묘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민준은 피식 웃었다. 이제는 이 괴짜 신선님의 잔소리조차 정겹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파트의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미묘하게 변했다. 민준이 작업에 집중할 때면, 그의 등 뒤에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때로는 막혔던 아이디어가 물 흐르듯 풀리기도 했고, 때로는 붓질 하나하나에 섬세한 영감이 깃드는 듯했다. 신선이 무의식중에 민준에게 자신의 오랜 지혜나 영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민준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묘한 동거가 그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의 웹툰 스토리는 점점 더 신비롭고 깊은 세계관을 담게 되었고,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전에는 없던 ‘영적인 무언가’를 느낀다고 평했다.

현대 도시의 아파트 14층. 그곳에는 웹툰 작가 지망생 김민준과, 현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잊혀진 신선이 함께 살고 있었다. 불협화음처럼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어쩌면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민준은 신선이 가끔 옮겨놓는 리모컨을 찾아 헤매며, 그의 투명한 동거인과 함께 고요하면서도 활기찬 하루를 보낸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가, 바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아파트의 14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