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제국의 심장을 휘감은 밤이었다. 수도 외곽, 황실 직속 곡물 공납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달빛 아래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병사들의 발소리는 규칙적인 파동처럼 밤의 고요를 찢고 지나갔다. 이곳은 제국이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탐욕의 성채였다.

“작전 브리핑은 내가 수십 번이나 반복했는데, 또 잊은 건 아니겠지, 강태한?”

한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경계심으로 번뜩였다. 밤하늘처럼 검은 제복은 그녀의 실루엣을 완벽히 감췄다.

옆에 바짝 엎드려 있던 강태한은 하품을 길게 늘어뜨렸다.

“아, 유리 양. 우리 사이인데 뭘 또 그렇게 새삼스럽게. 내 두뇌는 보고 듣는 순간부터 이미 모든 걸 완벽하게 각인하고 있다고. 심지어 유리 양의 잔소리까지도 말이야.”

그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유리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내 잔소리 말고, 곡물 공납 장부 파기가 최우선이라는 걸 기억해. 그리고 병사들의 순찰 경로는….”

“알아, 알아. 20분 간격으로 좌측 망루에서 우측 망루, 그리고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다시 원점. 지붕 위 궁병은 30분 간격으로 교대, 늘 같은 시간에 말이지. 제국 놈들, 융통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태한은 마치 지루한 연극의 대사를 읊듯이 술술 말하며 턱을 괸 채 창고 지붕을 올려다봤다. 그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태도에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 됐어. 이번 작전은 우리 백성들의 생사가 걸린 일이야. 절대 실수해선 안 돼.”

“걱정 마시라. 이 몸 강태한에게 불가능이란 없으니까. 어? 저기 딱 맞춰 궁병 교대 시간이네. 내가 먼저 갈게.”

태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낡고 투박한 갈고리였다.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능숙하게 휘두르더니, 슉,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육중한 창고 외벽에 척 하고 박혔다. 그의 움직임은 투박해 보였지만 놀랍도록 정확하고 빨랐다.

유리는 그가 갈고리를 박는 순간, 혹시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심장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병사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교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쳇, 폼 잡기는.”

유리는 투덜거리면서도 태한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날렵한 동작으로 밧줄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섰다. 먼저 도착한 태한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는 그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스로 지붕 위에 착지했다.

“나름 매너였는데.”

“매너 따윈 개나 줘. 시간이 없어.”

지붕을 타고 은밀하게 이동하던 중, 창고 안쪽에서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유리가 멈춰 섰다.

“잠깐, 저 소리….”

“흐음, 쿵, 쿵, 쿵…. 짐 옮기는 소리 같군. 이 시간에 웬 난리래?”

태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엔 모두 잠들어 있어야 했다.

“젠장, 예상치 못한 변수야. 창고 안 동선이 복잡해질 수 있어. 조심해야 해.”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들은 지붕의 해치를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내려섰다. 거대한 창고 내부는 썩은 곡물 냄새와 먼지로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곡물 자루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기 봐, 유리 양. 저게 다 백성들이 피땀 흘려 바친 곡식이라고. 이 놈들은 썩어나가도 상관없다 이거지.”

태한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 장난기는 사라지고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평소엔 허둥대고 장난만 치는 것 같아도, 이런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태한이었다. 유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 장부 파기,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해. 저 곡식들을 빼돌릴 순 없겠지만, 저것들이 왜 이 시간에 움직이는지 알아봐야겠어.”

그들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창고 안쪽으로 향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촛불 빛이 그들을 인도했다. 곧, 그들은 작은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과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달 보고서에 따르면 북부 지방의 반란 기미가 심상치 않다고 했지?”

“예, 국장님. 특히 ‘붉은 깃발’ 세력이….”

유리와 태한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붉은 깃발’은 그들의 동지들이자, 현재 가장 활발하게 제국에 맞서고 있는 반란 세력 중 하나였다. 이들이 제국의 핵심 인물이라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태한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윙크했다. ‘내가 처리할게.’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무모한 짓은 안 돼.’

하지만 태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꼬불꼬불하게 휘어진 철사를 꺼내더니, 사무실 문에 달린 자물쇠에 쑤셔 넣었다.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유리가 미처 막을 새도 없었다.

태한이 문을 스윽 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정적.**

유리와 태한은 서로를 쳐다봤다. 태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어… 설마 벌써 눈치챈 건가?”

그 순간, 쾅! 하고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건장한 체격의 병사 하나가 튀어나왔다.

“거기 누구냐!”

“젠장! 강태한!”

유리가 소리쳤다. 태한은 ‘에헤이, 들켜버렸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순식간에 병사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병사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안에서 또 다른 두 명의 병사가 뛰쳐나왔다.

“이런, 손님들이 잔뜩 계셨네!”

태한은 능글맞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낡은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쩌렁!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 한 명이 이마를 맞고 쓰러졌다. 유리는 태한의 무모한 행동에 기가 막혔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재빠르게 남은 병사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장부! 장부를 찾아!”

유리가 소리쳤다. 태한은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남은 병사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유리는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두툼한 가죽 장부와 여러 서류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북부 지방 곡물 공납 현황’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장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유리는 급하게 장부를 움켜쥐었다. 그때, 밖에서 태한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 양! 손님들이 자꾸 늘어나잖아! 여기 난리 났어!”

사무실 문밖에서는 이미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태한을 에워싸고 있었다. 태한은 프라이팬 하나로 그들을 상대하며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주었다. 휘두르고, 막고, 피하고. 그의 움직임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유리는 장부를 품에 안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태한! 퇴각해야 해!”

“퇴각은 무슨! 이참에 다 때려눕히고 시원하게 나가야지!”

태한이 허세를 부리며 크게 외쳤지만, 한 병사의 칼날이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자락과 함께 피가 맺혔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장부만 파기하면 돼!”

유리는 허리춤에서 꺼낸 작은 화염 주머니를 장부를 향해 던졌다. 북부 지방 곡물 공납 현황이 빼곡히 기록된 장부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제국의 부패한 기록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자, 이제 도망갈 시간! 유리 양!”

태한이 너스레를 떨며 연막탄을 터뜨렸다. 하얀 연기가 순식간에 창고 안을 뒤덮었다. 병사들은 기침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 혼란을 틈타 유리는 태한의 손목을 낚아채고 창고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지붕 위로!”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병사들의 추격을 따돌리며 창고를 가로질러 달렸다. 태한은 뒤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저 사람들 진짜 집요하네. 내 팬클럽인가?”

“닥치고 뛰어!”

겨우 지붕 해치를 통해 다시 밤하늘 아래로 올라선 그들은, 지붕 위를 달려서 멀리 떨어진 외벽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병사들의 고함과 비명,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벽에 매달린 밧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숲 속으로 달아났다. 얼마쯤 달렸을까, 더 이상 추격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유리는 나무 뒤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태한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 역시 우리 콤비는 최고야. 완벽한 작전 수행이었어.”

태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은 개뿔! 네가 문을 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개고생할 일은 없었잖아!”

“에이, 그럼 누가 ‘붉은 깃발’ 정보를 들을 기회를 줬겠어? 그리고 내가 프라이팬으로 병사들을 상대하는 동안 유리 양은 중요한 장부를 태웠잖아.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고!”

태한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유리는 피가 맺힌 그의 팔을 째려봤다.

“팔은 또 언제 다친 거야? 바보같이.”

“별거 아니야. 훈장 같은 거지. 이 상처가 제국에 맞선 우리들의 용기를 보여주는 증표 아니겠어?”

태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다. 유리는 말없이 품속에서 약초와 천 조각을 꺼냈다.

“이리 와. 소독이라도 해야지.”

“오호, 유리 양이 이렇게 다정할 때도 있네. 감동인데.”

태한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유리는 그의 팔을 잡고 능숙하게 약초를 바르고 천으로 감쌌다. 그녀의 손길은 생각보다 섬세하고 따뜻했다. 태한은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아까 그 사무실에서 들었던 ‘붉은 깃발’ 소식 말인데… 그놈들이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았어. 제국이 신경 쓰는 걸 보니, 분명 중요한 움직임일 거야.”

유리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한의 눈빛도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붉은 깃발’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든, 우리도 움직여야 해.”

“맞아. 이번 장부 파기로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동안, 우린 다음 작전을 준비해야 해. 어쩌면, 제국의 심장을 한 번 더 뒤흔들 기회가 올지도 몰라.”

유리는 어둠 속 저 멀리, 빛나는 수도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은 화려했지만, 동시에 탐욕스러운 제국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태한은 그녀의 옆에 앉아 같은 곳을 응시했다.

“좋아. 그럼 다음 작전은 내가 프라이팬 말고 좀 더 간지나는 무기를 들고 나가봐야겠어.”

태한이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네가 프라이팬을 들든 냄비를 들든 상관없으니, 제발 작전 중엔 사고 좀 치지 마.”

“노력해볼게, 유리 양.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서 말이지!”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제국의 압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평민들의 저항은 그렇게 계속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또 다른 위험과 함께, 어쩌면 서로에게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어둠 속에서 스며들고 있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동쪽 하늘, 아직 밤의 장막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그곳에서, 그들의 새로운 전투가 시작될 채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