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흑림(黑林)의 안개는 언제나 끈적했다.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가지마다 덕지덕지 매달린 검은 이끼들은 으스스한 기운을 더욱 진하게 풍겼다. 인간과 마(魔)의 영역을 가르는 거대한 경계, 흑림은 무림인들에게는 금기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룡문의 소사(少師) 류진(柳眞)은 기어코 이곳까지 발걸음을 했다.

“쯧, 마기가 진동하는군.”

류진은 콧등을 찌르는 비릿하고 역한 기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품에서 묵직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집마저도 검은 현철로 단련된 ‘묵룡검(墨龍劍)’. 검은 그의 손에 쥐이자마자 미약한 진동을 시작했다. 흑림의 마기에 대한 검의 경고였다.

이번 임무는 단순했다. 최근 흑림 주변에서 마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그 선봉에 선 것이 류진이었다. 스승님은 늘 그에게 ‘무리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류진은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였다.

숲은 침묵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은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류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뒤틀린 나무들뿐, 그러나 그의 예리한 감각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때였다. 숲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번뜩였다. 일반적인 마기의 기운과는 다른, 맑고도 신비로운 기운. 류진은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숲은 점차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나무들은 더욱 뒤틀렸고, 바닥에는 이름 모를 보랏빛 꽃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피어 있었다. 빛의 근원지는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웅덩이였다. 그러나 웅덩이는 평범하지 않았다. 맑은 물 위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기이한 꽃들이 수를 놓았고, 그 중앙에 한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고고하게 누워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물결 따라 일렁였고, 백옥 같은 피부는 달빛 아래 더욱 신비롭게 빛났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듯한 비현실적인 자태였다.

류진은 저도 모르게 묵룡검의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경고음처럼 그의 심장을 울렸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과연 마족인가? 아니면 길을 잃은 요정인가?

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발, 또 한 발. 웅덩이 가장자리에 이르러 그는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연꽃 같은 눈이 서서히 열렸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 그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류진을 빨아들였다. 순간, 류진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마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고, 원초적인 기운이었다.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흑림의 으스스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목소리 같았다.

류진은 얼어붙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되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천룡문 류진입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을 소개했다. “이곳은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웅덩이 주변의 보랏빛 꽃들이 더욱 진하게 빛나는 듯했다.

“위험한 곳이라……. 저에게는 익숙한 곳이에요.”

그녀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듯 류진의 묵룡검에 닿았다. 순간, 묵룡검에서 미약한 ‘칭-‘ 하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 그녀의 존재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족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마족이 아니었다.

류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이성은 그녀를 경계하라 속삭였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 헤어날 줄 몰랐다.

“당신은…… 마족입니까?” 류진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아홉 개의 꼬리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색의 털로 뒤덮인 아홉 개의 꼬리, 그 끝자락에서는 섬광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구미호. 요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하다는 전설 속 존재였다.

“이제야 아셨나요?”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방울 하나 없이 마른 몸은 마치 환영처럼 느껴졌다. “저는 연화(蓮花)라고 합니다.”

연화. 연꽃. 이름마저도 그녀의 고고한 자태와 어울렸다.

“마족은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흑림은 경계 지역…….” 류진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연화는 류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당신은, 어째서 저를 해치지 않으시나요?”

그녀의 질문에 류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왜일까. 그의 본능은 분명 그녀를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천룡문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족은 인간의 적, 무림의 공적이었다. 마땅히 검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묵룡검은 여전히 검집 속에 잠들어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류진은 나직이 대답했다. “다만, 당신에게서 마족 특유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 말에 연화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흑림에 울려 퍼졌다.

“흥미롭군요.” 연화가 천천히 류진에게로 다가왔다. 발소리 하나 없이, 그녀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인간들은 늘 제가 아름다운 외양 뒤에 악독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은 저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녀가 손을 뻗어 류진의 뺨에 닿으려 했다. 류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뺨에 닿기 직전, 숲 저편에서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있다! 저 요물! 류 소사님, 어서 그 요물을 베십시오!”

세 명의 무림인이 흑림을 가르고 달려왔다. 그들의 눈에는 연화를 향한 맹렬한 증오가 가득했다. 그들은 흑림 주변에서 마족의 준동을 감시하던 천룡문의 제자들이었다.

류진은 순간 망설였다. 그들 역시 마족을 발견하면 즉시 처단하라는 명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류진의 시선은 아직도 연화의 보랏빛 눈동자에 갇혀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같으니.” 연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빛에 깃든 신비로운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그녀의 아홉 꼬리가 일렁이며 류진의 몸을 감쌌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류진은 그녀에게 안긴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연화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림인들을 향하자,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아홉 꼬리 중 하나가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흑림의 나무들이 일순간 진동하고, 마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듯 무림인들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할 압도적인 힘이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연화가 류진을 놓아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적이 되어 있겠지요.”

그녀의 몸이 서서히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홉 개의 꼬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하게 섬광을 뿜어내더니, 이내 연화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류진은 홀로 흑림의 웅덩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연화가 앉았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보랏빛 꽃잎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적이 되어 있겠지요.’

적. 인간과 마족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은 무림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류진의 심장은 그 철칙을 거부하듯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흑림의 깊숙한 곳, 연화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금지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꽃은, 흑림의 안개처럼 끈적하고, 보랏빛 꽃처럼 치명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