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도시의 회색 빌딩 숲 위로 하얀 솜털 같은 눈송이들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오후.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마치 낡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고요하고 아련했다. 지우는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차가운 유리창에 기댔다. 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그녀의 가슴 속에서도 희미한 그리움이 피어났다.
세월이 흘러도,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어도 그날의 기억은 언제나 첫눈처럼 선명했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시린 공기, 귓가를 간지럽히던 작은 눈송이들, 그리고… 그의 목소리.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지우의 눈에 작은 놀이터의 낡은 그네가 들어왔다.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 앙상한 겨울 나무들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그네. 마치 지난 시간을 붙잡고 있는 듯 보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네를 보는 순간, 시간은 십여 년 전의 어느 겨울날로 거침없이 역행했다.
얼어붙은 시간 속으로
“야, 지우야! 더 빨리 달려봐!”
소년의 목소리가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붉게 상기된 볼, 거친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지우는 연신 깔깔거리며 눈밭을 내달렸다. 그녀의 뒤를 쫓아오던 현우는 한 손에 지우의 목도리를 휘두르며 그녀보다 더 신나게 소리쳤다. 그들의 발자국마다 하얀 눈먼지가 펑펑 솟아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갓 내린 눈은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도화지 같았고, 세상은 오직 그들 둘만을 위한 거대한 놀이터 같았다. 동네 어귀의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지우는 헐떡이며 멈춰 섰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찼지만, 이상하게도 폐부 깊숙이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현우야… 더는 못 뛰겠어…!”
지우는 눈밭 위에 철퍼덕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코끝은 새빨개져 있었고, 앞머리에는 녹다 만 눈송이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현우는 그런 지우의 옆에 풀썩 앉더니, 피식 웃으며 손에 든 목도리를 그녀의 목에 둘러주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손길에 지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러게, 내가 조심해서 뛰라고 했잖아. 넌 늘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
현우의 목소리는 장난기 가득했지만, 그의 눈빛은 지우의 눈을 부드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그리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소년 특유의 순수함과 개구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지우는 고개를 숙여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친구 이상의 감정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어린 지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들은 한없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세상을 하얗게 덮었고, 그 위로 작은 침묵이 드리워졌다. 그때, 현우가 손을 내밀었다. 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받아.”
현우의 손바닥 위에는 갓 떨어진 눈송이 하나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육각형의 완벽한 결정체. 지우는 숨을 죽이고 그 작은 아름다움을 응시했다. 그렇게 완벽한 눈꽃은 처음이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꿈처럼,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신기하다…”
지우의 목소리에 감탄이 실렸다. 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 세상에 똑같은 눈꽃은 하나도 없대. 그래서 더 특별한 거야. 이 눈꽃처럼, 우리도 특별한 약속 하나 할까?”
“약속?”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현우의 눈동자가 깊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진지함에 지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응. 음… 있잖아. 내가 나중에 말이야, 꼭 아주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거야. 그래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눈이 펑펑 내리는 풍경을 아주 크게 그려줄게. 그때 되면 네가 내 첫 번째 전시회에 꼭 와서 제일 먼저 그림을 봐줘야 해. 어때? 멋진 약속이지?”
현우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지우는 현우의 진지한 눈빛에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현우는 그림 그리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지만, 부모님은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의 꿈은 늘 비밀스러운,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이었다.
“진짜? 네가 그린 눈꽃 그림이라니… 상상만 해도 너무 멋지다! 나 꼭 갈게. 네 첫 번째 전시회에. 그리고 그때 나도 너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해줄게.”
“특별한 선물? 뭔데?”
현우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지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밀이야. 그때까지 궁금하게 만들어야지!”
둘은 깔깔 웃었다. 순백의 눈밭 위에서 두 소년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현우는 손바닥 위의 눈꽃을 조심스레 지우의 손바닥에 옮겨주었다. 차가운 눈꽃이 지우의 따뜻한 살갗에 닿자마자 스르르 녹아내렸다. 하지만 녹아버린 눈꽃의 흔적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약속. 이 눈꽃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을 약속.”
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반짝이는 눈꽃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들의 약속은 세상 모든 눈송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아름답게 굳어지는 듯했다.
얼어붙은 그리움
“지우 씨,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낯선 목소리가 지우를 현실로 끌어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사무실 동료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지우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냥… 창밖을 보다가요.”
어색하게 웃는 지우를 보며 동료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우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낡은 그네는 여전히 눈을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눈발은 아까보다 더 거세져 있었다. 창문 밖 세상은 온통 하얀 장막에 갇힌 듯했다.
그 눈꽃 같은 약속 이후로, 그들은 이듬해 봄 현우의 부모님이 사업 때문에 갑자기 이사를 가면서 헤어졌다. 어린 지우는 현우가 떠난다는 사실에 며칠 밤낮을 울었지만, 현우는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멋진 화가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 그때 네가 내 그림을 제일 먼저 봐줘야 해.”
그것이 현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그리고 직장인이 되면서 지우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약속을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몇 번의 연락 시도도 있었지만, 이사 간 현우네의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고, 우편물도 반송되었다. 시대는 점차 디지털화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어린아이들이 친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일일이 저장하고 연락을 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끔씩 겨울이 오면, 특히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지우는 그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현우는 정말 화가가 되었을까? 그의 첫 번째 전시회는 어디에서 열렸을까? 그리고 그는 약속했던 그 그림을 정말 그렸을까?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리움이 다시 차가운 눈송이처럼 가슴속에 내려앉았다. 그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
무심코 전화를 받으려던 지우는 순간 멈칫했다. 귓가에 현우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는 듯했다. ‘이 눈꽃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을 약속.’
혹시… 어쩌면… 말도 안 되는 희망이 지우의 가슴 한구석에서 작은 눈꽃처럼 피어났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여보세요? 김지우 씨 되십니까? 여기는 OOO 미술관입니다. 최근에 기증된 그림 중 김지우 씨의 이름이 적힌 작품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기증된 그림? 김지우의 이름이 적힌 작품?
창밖으로 눈은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마치 오래된 약속을 잊지 말라고, 세상을 온통 하얀 눈으로 덮어버리려는 듯이. 지우는 수화기를 든 채, 텅 빈 눈빛으로 창밖의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그림을 기증한 사람은… 현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