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시작, 낯선 시골집
찌르르, 찌르르. 매미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지우는 축 늘어진 채 학교 앞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오늘부터 여름 방학이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학원이나 해외여행 계획으로 들떠 있었지만, 지우에게 여름 방학은 그저 ‘할아버지 댁’이라는 이름의 시골 감옥으로 가는 시간이었다. 매년 반복되는 여름이었다.
“지우야! 할아버지 댁 잘 다녀와!”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밝게 인사하며 지우의 손에 커다란 가방을 쥐여 주었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 안에는 만화책 몇 권이 숨겨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만화책을 ‘쓸데없는 종이 쪼가리’라고 부르곤 했기에, 혹시라도 들킬까 봐 내심 불안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도심을 벗어났다. 창밖 풍경은 아파트 숲에서 점차 푸른 산과 논밭, 그리고 멀리 보이는 흐릿한 산등성이로 바뀌었다. 처음 한두 시간은 잠시 설렜던 지우도 이내 지루함에 몸을 뒤척였다. 스마트폰은 터미널에서 충전기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미 방전된 지 오래였다. 할아버지 댁은 시골 중에서도 더 깊은 시골에 있었다. 마지막 마을버스마저 끊긴 후, 한 시간가량을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깊은 산골, 할아버지의 손길
어스름이 깔리고 나서야 버스는 작은 시골 정류장에 지우를 내려주었다. 정류장이라기보다는, 낡은 나무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길가였다. 가로등은커녕 변변한 가게 하나 없는 곳이었다. 도시의 밝은 불빛에 익숙한 지우의 눈에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지우는 작은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점멸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오는 실루엣은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였다.
“아이구, 우리 지우 왔는가! 한참 기다렸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구수했다. 얼굴에는 깊게 팬 주름이 웃을 때마다 더욱 깊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지우의 가방을 능숙하게 받아들고는 앞장섰다. 손에 든 낡은 랜턴 불빛이 비추는 길은 울퉁불퉁하고 좁았다. 양옆으로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길을 덮을 듯했다. 낯선 풀냄새와 흙냄새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버스가 끊겨서 무서웠단 말이에요.” 지우는 투덜거렸다.
“길이 멀지 않느냐. 그리고 이 할아비는 느긋한 게 체질이라서 말이다. 도시에선 다들 그리 바삐 살아서 어찌 그리 숨 쉬고 사는지 모르겠다. 여기선 시간이 도시에 비하면 한 서너 배쯤은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으니, 그 맛에 사는 게지.”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앞서 걸었다. 주변은 온통 풀냄새와 흙냄새로 가득했다. 멀리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도시에서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날것 그대로의 냄새였다. 지우는 발아래로 스쳐 가는 풀잎과 풀벌레 소리에 자꾸만 움찔거렸다. 어둠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들이 그를 지켜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한참을 걸어 드디어 할아버지 댁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기와지붕을 얹은 낡은 한옥이었다. 마당 한가운데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한낮에는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고, 밤에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할아버지 댁의 상징 같은 나무였다. 거대한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마치 이 집과 산골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오래된 집의 숨결
할아버지 댁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시원한 바람이 지우의 땀을 식혀주었다. 흙벽과 굵은 나무 기둥에서는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루는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마저도 정겨웠다. 문틀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집 안의 고요함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어여 와서 밥 먹어라. 할미가 맛있는 거 해놨다.”
부엌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는 허리춤에 앞치마를 두른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우는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았다. 할머니는 이미 따뜻한 밥과 갖가지 나물, 그리고 직접 잡은 듯한 생선구이를 상에 내놓고 있었다. 도시의 인스턴트 음식에 익숙해진 지우에게는 낯설었지만, 할머니의 정성이 느껴지는 따뜻하고 군침 도는 밥상이었다. 지우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오랜 이동과 낯선 환경에 지쳐있던 몸이 따뜻한 밥 한 술에 노곤하게 풀리는 듯했다.
밥을 먹고 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 반짝였다. 은하수가 희미하게 흐르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할아버지는 마루 끝 평상에 앉아 곰방대를 피우고 있었다. 톡톡 터지는 불씨와 함께 은은한 담배 냄새가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할아버지, 여기는 왜 이렇게 조용해요? 신기해요.” 지우가 물었다.
“원래 산골이 조용한 법이지. 하지만 잘 들어보면 조용한 게 아니란다. 밤벌레 소리, 바람 소리, 멀리 계곡 물소리… 모두 살아있는 소리들이지. 도시의 소음과는 다르단다. 이 소리들을 들을 줄 알아야 비로소 이 산골에 온 것이란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곰방대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할아버지를 따라 뒷산에 가볼까? 저 느티나무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무도 모르는 신기한 연못이 하나 있단다. 그 연못에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 어쩌면 우리 지우에게 재밌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할아버지의 말에 지우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뒷산’, ‘신기한 연못’, ‘아무도 모르는’, ‘오래된 이야기’. 지루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여름 방학이 어쩌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지우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단순한 시골집이 아니었다. 이 오래된 집과 깊은 산골은 어쩌면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에 누웠다. 창밖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밌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오래된 집의 숨결 속에서, 도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지의 여름 모험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우는 다음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