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밤**
이서진은 늘 그랬듯, 새벽녘에 눈을 떴다. 정확히는 ‘떠졌다’는 표현이 맞았다. 이젠 알람 소리보다 더 확실하게 그녀를 깨우는 어떤 불쾌한 감각이 있었다. 싸늘함. 보일러를 아무리 강하게 틀어도 침실 한구석에서 스며드는 것 같은 냉기가 이불 속까지 파고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시선은 습관처럼 협탁 위로 향했다. 어젯밤 분명히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스마트폰이 없었다. 시선을 내리자 침대 아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액정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젠장, 또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제도 그랬다. 현관 신발장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차 키가 아침에 보니 냉장고 문에 붙어 있었다. 이틀 전에는 거실 테이블 위 리모컨이 욕실 변기 위에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탓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핸드폰 액정의 금은 명백한 증거였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움직인 흔적이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핼쑥했다. 친구 박민재에게 전화를 걸까 망설였다. 말했다간 또 “야, 너 진짜 너무 피곤한 거 아니냐? 주말에라도 어디 바람 좀 쐴까?” 같은 뻔한 대답만 돌아올 것이 뻔했다. 게다가 민재는 워낙 현실적인 친구였다. 이런 비이성적인 이야기를 하면, 미신을 맹신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 같았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가방에 폰을 다시 넣었다. 쨍한 햇살 아래, 대도시의 빌딩 숲은 언제나처럼 냉정하고 무심했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우연히 민재와 마주쳤다.
“서진아, 얼굴이 왜 이렇게 헬쑥해? 잠 못 잤어?”
민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서진은 애써 웃었다.
“어? 아니, 그냥 요즘 좀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잠자리가 바뀌어? 이사라도 했어? 농담하지 말고.”
“아니, 그냥… 꿈자리가 좀 사나워서 그래.”
서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민재는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를 더 캐묻지는 않았다.
퇴근 후, 텅 빈 집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보일러를 최대로 올렸는데도 늘 이랬다.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선 순간, 그녀의 눈은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책들이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몇 권은 페이지가 구겨진 채 뒤집혀 있었고, 가장 아끼던 문학 서적 한 권은 겉표지가 찢겨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서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는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었다. 명백한 ‘파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들에 다가가 발로 밀어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같았다.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누가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침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걸 민재에게 보내야 할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경찰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제 책들이 스스로 바닥에 떨어져 찢어졌어요’라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 ‘그랑드팰리스’의 고요함은 더 깊은 불안으로 변했다. 서진은 바닥에 흩어진 책들을 대충 정리한 후, 거실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불을 모두 켜두었지만, 여전히 어둠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금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릴까 봐 귀를 쫑긋 세웠다.
‘툭.’
작은 소리였다. 주방 쪽에서 들려왔다. 서진은 숨을 멈췄다. 설마. 주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한 발 한 발,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꽃집에서 사 온 작약꽃이 꽂힌 투명한 유리 화병이 놓여 있었다.
‘쨍그랑!’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화병에 거의 다다랐을 때, 화병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맑고 깨끗했던 꽃잎들은 물과 유리 파편에 젖어 축 늘어졌다. 서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실의 모든 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전구처럼, 한 번에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섬광 속에서 주변의 사물들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증폭되는 것 같았다.
“끄아악!”
갑자기 주방 찬장 서랍이 ‘스르륵’ 열리더니, 칼날이 번뜩이는 식칼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서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퍽!’ 칼은 그녀의 머리 위, 거실 벽에 박혔다. 정확히 말하면, 불과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 벽에 깊숙이 박힌 것이다. 칼날이 박힌 충격으로 벽지 일부가 찢어지고 회색 시멘트가 드러났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혔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 더 이상 꿈도, 스트레스도, 건망증도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공격이었다.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살해 시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조각난 화병, 벽에 박힌 식칼, 엉망진창이 된 책들.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서진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제는 민재에게 전화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민재의 이름을 불렀다.
“민재야… 나 좀 살려줘… 나 지금… 내 집에… 뭔가 있어…”
수화기 너머로 민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술 마셨어?”
“아니… 아니야… 칼이… 칼이 나를… 벽에… 박혔어… 나… 죽을 뻔했어…”
민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진아, 네가 요새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것 같아. 내가 지금 갈 순 없는데, 내일 아침에 들를게. 괜찮아. 너무 무서우면 잠깐이라도 엄마 집에 가 있든지, 아니면 그냥 내일 내가 회사 빠지고 가서 하루 종일 옆에 있어줄게. 지금은 일단 진정하고… 어?”
민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서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통화를 마친 후, 벽에 박힌 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칼날이 박히며 찢어진 벽지 아래, 드러난 회색 시멘트 벽면에 시선이 닿았다.
그 순간, 서진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벽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시멘트 벽면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기하학적이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문양. 그것은 현대의 어떤 건축 양식에서도 본 적 없는, 고대 상형문자 같은 것이었다. 마치 이 ‘그랑드팰리스’ 아파트가 지어지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흔적처럼. 그리고 그 문양들 사이에서, 가장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한 글자. 아니, 한 형상.
그것은 인간의 심장 모양을 한, 붉은색으로 희미하게 물든 문양이었다.
아니, 심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찢겨나간 살점의 단면 같았다.
그리고 그 문양에서,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 냉기가 그녀의 아파트를 지배하고, 이 모든 기괴한 현상의 원흉인 것처럼.
서진은 그 문양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아파트, 아니, 이 땅 밑에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처음부터 잘못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벽에 박힌 칼과 그 아래 새겨진 기이한 문양을 번갈아 보았다. 이 아파트가, 이 도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다른, 어떤 잊힌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현상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이것은… *무언가*가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녀가 보지 못했던, 혹은 보아서는 안 될 메시지.
그 밤, 서진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벽에 박힌 칼과 그 아래 문양이 그녀를 감시하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미지의 힘에 의해 균열이 가기 시작한, 위태로운 현실의 경계선이었다.
다음 날 아침, 민재가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릴 때까지, 서진은 그저 공포에 질린 채 벽에 박힌 칼을 응시하고 있었다. 칼날 끝에서 번뜩이는 희미한 빛은 마치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