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수려촌(秀麗村)을 감쌌다. 이름과는 달리, 이 산골 마을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황량한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겨울의 초입에서 이미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천룡제국(天龍帝國)의 거대한 그림자가 이 작은 마을까지 집어삼킨 지 벌써 수년.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대신, 깊은 고통과 체념만이 자리했다.
강민은 낡은 오두막 앞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숨을 골랐다. 그의 등에는 갓 베어 온 땔감 한 짐이 짊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다 닳아빠진 곡괭이가 매달려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지난 몇 달간 매일 이 짓을 반복했다. 제국에서 부과하는 벌목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더 이상 베어낼 나무조차 얼마 남지 않은 산을 헤매는 것이 일상이었다.
“민아, 어서 들어와 쉬어라. 얼어 죽겠다.”
오두막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여윈 몸으로 항상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머니였다. 강민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흙벽으로 지어진 오두막 안은 바깥보다 나을 것 없었지만, 그래도 희미한 불씨가 남아 있는 화덕 덕분에 온기가 조금은 느껴졌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오늘은 몸 좀 어떠세요?”
“괜찮다, 괜찮아.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내가 어찌 드러누워 있겠느냐. 그나저나 오늘도 할당량은 다 채웠느냐?”
어머니의 걱정 어린 눈빛에 강민은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관리들이 정해놓은 할당량은 상식 밖이었다. 건장한 장정 서넛이 온종일 매달려도 겨우 채울까 말까 한 양을, 이 작은 마을의 노약자들이 나눠서 감당해야 했다.
“네, 겨우 채웠어요. 하지만 이제 정말 나무가 없어요. 이러다가는 산까지 다 베어낼 판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분노는 사치였다. 드러내는 순간, 제국의 감찰관들에게 끌려가 채찍질을 당하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수려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국 변방의 모든 마을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공납과 강제 노역, 그리고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가해지는 잔혹한 처벌. 그것이 천룡제국 아래 백성들의 삶이었다.
강민은 차마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땔감 외에 또 다른 소식이 있었다. 내일, 제국의 감찰관들이 마을에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 감찰관이 아니라, ‘벽력당(霹靂黨)’이라 불리는 제국의 특수 무력 집단 소속이었다. 벽력당은 황실 직속의 무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국 전역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모두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힌 강호인들이었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피가 마르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만 자거라. 내일은 벽력당이 온다고 했으니…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강민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밖에서 들려오는 매서운 바람 소리가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그의 마음을 옥죄었다.
***
다음 날 아침, 싸늘한 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마을 어귀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열 명이 넘는 인원. 그들의 허리춤에는 시커먼 검이 매달려 있었고, 굳은 얼굴에는 잔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두에 선 자는 우락부락한 체구에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벽력당의 대주(大主), 장량(張良)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 누구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놈들아! 다들 모여라! 빨리 나와!”
장량의 일갈에 마을 사람들은 잔뜩 움츠러든 채 오두막에서 나왔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뒤로 숨었고, 노인들은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강민 역시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자신도 모르게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곳 수려촌의 마을 이장은 누구냐!”
장량의 질문에 나이 지긋한 마을 이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벌써부터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인… 소인 이장 김판석입니다… 벽력당 대주님께서 이곳까지 어인 일로…?”
“어인 일이라니! 황제의 명이시다! 최근 공납이 너무나도 저조하다는 보고가 있어 친히 행차했다. 당장 이 마을의 모든 곡식과 짐승을 내어놓아라!”
장량의 말에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가 교차했다. 이미 지난달 공납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겨울 보리가 전부였다.
“대… 대주님! 저희는 이미 지난달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은 것은 저희가 겨울을 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뿐입니다! 그것마저 빼앗으시면… 저희는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 이장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십시오, 대주님!”
“제발… 제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장량은 코웃음을 쳤다.
“흥! 황제 폐하의 자비는 너희 따위에게 베풀어질 것이 아니다! 너희 같은 미물들이 황제 폐하의 권위를 더럽히고 감히 거역하려 드느냐! 모두 듣거라!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이 마을의 모든 곡식과 가축을 징수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 스무 명을 선발하여 제국 건설 현장으로 보낼 것이니, 모두 준비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력당 무사들이 곤봉을 들고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흐느꼈고, 노인들은 주저앉아 통곡했다.
“안 돼! 제발… 제발 저희 아들은 안 됩니다! 얘가 없으면 누가… 누가 늙은 저를 돌본단 말입니까!”
한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끌고 가려는 벽력당 무사에게 매달렸다. 벽력당 무사는 귀찮다는 듯 할머니를 발로 차버렸고, 할머니는 맥없이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강민의 눈이 이글거렸다. 억지로 참아왔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개만도 못한 놈들!”
강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손에는 언제 쥐었는지 모를 낡은 곡괭이가 들려 있었다. 벽력당 무사 중 한 명에게 냅다 휘두른 곡괭이는 엉성했지만, 맹렬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무사는 당황한 듯 피했고, 곡괭이는 허공을 갈랐다.
“이런 미물이 감히…!”
무사가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강민은 다시 한번 곡괭이를 휘둘러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사가 비틀거렸다. 평소 산에서 땔감을 나르며 단련된 강민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크윽… 이놈이…!”
무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졌고, 그 사이 강민은 다른 무사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강민의 반항에 벽력당 무사들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강민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함께 희미한 희망이 섞여 있었다.
“건방진 놈! 당장 끌어내라!”
장량의 명령에 몇몇 벽력당 무사들이 강민에게 달려들었다. 강민은 맹수처럼 거칠게 저항했지만, 그들은 제국에서 훈련받은 정예 무사들이었다. 한 무사가 검의 손잡이로 강민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눈앞이 번쩍하고 어지러웠다. 강민은 휘청거리며 비틀거렸고, 그 틈을 타 다른 무사들이 그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땅바닥에 꿇어앉혔다.
“이… 이 개자식들아…!”
강민은 피가 터진 입술 사이로 욕설을 뱉었다. 장량이 싸늘한 표정으로 강민에게 다가왔다.
“하찮은 버러지 주제에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 벽력당에 대적하려 드느냐? 네놈이 누구인지 아느냐?”
“네놈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네놈들은…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일 뿐이다!”
강민의 외침에 장량은 픽 하고 비웃었다.
“감히 내 앞에서 지껄이는 말이 가관이구나. 좋다, 네놈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장량은 검집에서 검을 뽑는 대신, 오른손을 강민의 어깨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운을 실어 누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강민은 갑자기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장량이 내력을 실어 압박하는 것이었다.
“크아아악!”
강민의 비명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어깨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했고,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하지만 장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황제 폐하의 권위다. 네놈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지.”
장량은 강민이 완전히 기절할 때까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강민은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장량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공포보다는 끓어오르는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
벽력당은 그날, 수려촌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창고에 남아 있던 쥐꼬리만 한 곡식마저도 모조리 털어갔고, 겨우 몇 마리 남아 있던 가축들까지 끌고 갔다. 스무 명의 젊은 남자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갔고, 그중에는 강민의 사촌 동생도 있었다. 마을은 마치 유령처럼 텅 비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 대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민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의식을 회복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고, 어깨는 시뻘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그를 짓누른 것은 정신적인 절망감이었다. 그는 무력했다. 가족과 이웃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민아… 괜찮니…? 제발… 제발 다치지 마라… 이제 너마저 없으면….”
어머니의 목소리는 희미했고, 그녀의 손은 강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떨렸다. 강민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강자들의 횡포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하는가?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맹세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선… 맞서 싸워야만 한다.
강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절망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잿더미가 된 마을 너머, 멀리 보이는 제국의 수도 방향을 향해 그는 이를 악물었다.
**천룡제국… 반드시 무너뜨리고 말리라.**
그의 입에서 낮은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한 개인의 복수심이 아니었다. 억압받는 모든 백성의 절규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반란의 서곡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