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디쓴 복수, 달콤한 복병
따스한 봄볕이 창을 비집고 들어와 먼지 가득한 내 작업실 바닥에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그 빛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2년 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꿈 많고 해맑은 스물여섯의 나. 그리고 내 곁에는 언제나 내가 웃는 것보다 더 환하게 웃어주던 남자친구, 민준이 있었고, 그 옆엔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던 절친, 하영이가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우리는 더없이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완벽함이란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허상이었던가.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내 뇌리에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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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봄.*
*“유진아, 이거 정말 대박이야! ‘별빛 갈라’ 프로젝트, 네 아이디어라면 무조건 우리가 따낸다니까!” 하영이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내 노트북 화면 가득 펼쳐진, 내가 밤샘하며 구상한 기획안을 보며 민준이도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유진이가 해내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그들의 격려에 나는 하늘을 나는 듯했다.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프로젝트였다. 수천 개의 별이 쏟아지는 듯한 홀로그램 연출, 참석자 모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프로그램, 그리고 피날레를 장식할 예측 불가능한 서프라이즈 이벤트까지. 이 모든 것이 성공하면, 나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획자가 될 터였다. 하영이는 내 기획안을 보며 꼼꼼히 메모하고, 내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켜주겠다며 열의를 보였다. 순진했던 나는 그걸 정말 순수한 우정이라 믿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 나는 목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하영이가 나섰다. “유진이가 너무 열심히 준비해서 감기에 걸렸네요. 제가 대신 발표하겠습니다!” 나는 목 상태가 좋지 않아 내심 불안했지만, 하영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대에 선 하영이는 내 기획안을 마치 제 것인 양 유려하게 설명해 나갔다. 청중들의 감탄사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사장님실에서 들려온 비보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유진 씨 기획안, 훌륭합니다. 하지만 하영 씨의 기획안은 그야말로 독창적이었어요. 죄송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하영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준의 차가운 시선. “유진아, 미안하지만 이건 하영이가 훨씬 뛰어나… 넌 너무 감정적이야. 프로답지 못해.”*
*결국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배제되었고, 하영이는 내 아이디어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승승장구했다. 민준은 내가 아닌 하영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회사의 기대주로 떠올랐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감정적이라는 꼬리표는 나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나는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세상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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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웃는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내 얼굴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차분하고, 냉정하며,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낯선 여자였다. 지난 2년간 나는 이를 갈았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복수심이라는 지독한 연료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으며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기회가 왔다.
“유진 씨, 오늘 오후 3시에 ‘스타라이트 갈라’ 신규 프로젝트 브리핑 회의 있는 거 아시죠? 대표님께서 직접 진행하십니다.”
내 비서 지혜 씨의 목소리에 나는 사진을 뒤집어 놓았다.
스타라이트 갈라. 2년 전,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그 이름.
이번에는 내가 빼앗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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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착석해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제는 낯선 얼굴들이었다.
하영과 민준.
그들은 여전히 ‘더블유 이벤트’의 핵심 인재로, 변함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영은 화려한 원피스 차림으로 민준 옆에 앉아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민준은 예의 그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 사람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마치 2년 전의 그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처럼 보였다.
나는 조용히 회의실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내가 들어오는 것도, 내 존재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테고, 설령 안다 해도 한때 시시한 경쟁자였던, 이제는 이름 없는 기획자로 전락한 나를 알아볼 리 만무했다.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고, 훤칠한 남자가 들어섰다. 검은 수트를 완벽하게 소화한 날카로운 인상.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그를 감쌌다. 우리 회사의 새 대표, 강도현이었다.
강도현 대표는 단상에 서서 시선을 한 바퀴 훑었다.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내 쪽으로 향하던 그의 눈빛이 아주 잠시 멈췄다가 지나갔다. 착각일까.
“오늘 모인 여러분 모두, ‘스타라이트 갈라’ 프로젝트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우리 ‘에버스타’가 야심 차게 준비하는 새로운 비전의 첫걸음입니다.”
강도현 대표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듣는 이의 심장을 울렸다. 그는 짧고 간결하게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각 팀의 대표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나눠주고, 첫 번째 제안 설명을 시작할 팀을 호명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호명한 것은 바로 ‘더블유 이벤트’였다.
하영이 민준의 격려를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섰다. 2년 전과 다름없는 능숙한 말솜씨로 자신들의 기획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의 발표는 예상대로 화려하고 매력적이었다. 물론, 내 아이디어를 조금 더 손본 것에 불과했지만.
하영의 발표가 끝나자, 강도현 대표가 입을 열었다.
“더블유 이벤트의 기획안, 잘 들었습니다. 독창적이고, 시장의 흐름을 잘 읽고 있군요. 특히… 홀로그램 연출 아이디어는 인상 깊었습니다. 2년 전의 ‘스타라이트 갈라’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더욱 발전했군요.”
강도현 대표의 마지막 말에 하영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2년 전의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다니. 하영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웃어 보였다. “네, 대표님. 저희 더블유 이벤트는 항상 새로운 시도와 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강도현 대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류를 내려놓더니,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음은, 우리 에버스타 산하 ‘넥스트웨이브’ 팀의 유진 씨, 발표 부탁드립니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하영과 민준의 눈도 크게 뜨였다. 그들의 얼굴에서 혼란과 당황스러움이 읽혔다. ‘유진?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넥스트웨이브? 생전 들어보지 못한 계열사 이름. 하지만 그보다, ‘유진’이라는 이름에 반응한 것이리라.
나는 그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내 발걸음은 흔들림 없이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에 선 나는 강도현 대표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넥스트웨이브 팀 기획자, 한유진입니다.”
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단했다. 2년 전, 감기에 걸려 제대로 말도 못 하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스크린에 연결했다. 화면에 나타난 나의 기획안은, 2년 전 내가 구상했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달랐다. 더욱 정교하고, 더욱 과감하며,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저는 ‘스타라이트 갈라’를 단순히 보고 즐기는 행사가 아닌,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꿈’을 연결하는 축제로 만들고자 합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기획안을 설명해 나갔다. 2년 전의 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새로운 기술과 인터랙티브 요소를 접목시킨, 완벽하게 진화된 기획안이었다. 내가 직접 발로 뛰며 모아온 데이터와 섭외해 놓은 파트너사 정보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회의실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내 목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하영과 민준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특히 민준은 동요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변했다고? 저게 내가 알던 한유진이라고?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어쩌면 두려움까지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발표가 끝나자 강도현 대표는 미동도 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한유진 씨 기획안, 놀랍군요. 특히… 이 부분, 참여자의 소원을 담은 ‘별똥별 드롭’ 이벤트는 기획의도를 넘어선 깊이까지 느껴집니다.”
그가 짚은 부분은, 2년 전 나의 기획안에 없던, 순전히 내가 새롭게 구상해낸 핵심 아이디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아이디어는 지난 2년간 제 머릿속에서 숙성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내 말에 하영과 민준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나의 ‘잃어버린 꿈’이라는 말이 그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좋습니다. 오늘 발표는 여기까지 진행하도록 하죠.” 강도현 대표는 회의를 마무리했다. “최종 결정은 추후 통보될 것입니다. 각 팀은 최종 제안서를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제출해주십시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짐을 챙기며 그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영은 민준의 팔을 붙잡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고, 민준은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 그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복수의 시작이었다.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유진 씨.”
강도현 대표였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 기획안, 정말 당신 혼자서 구상한 것입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대표님.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제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좋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한유진 씨. 당신의 ‘꿈’이 어디까지 날아오를지.”
그의 말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나는 그의 시선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복수의 서막은 이제 막 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서막 위에서, 나의 복수는 더욱 달콤하고, 동시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내 곁에 나타난 이 남자가 과연 복수의 조력자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장애물이 될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루할 틈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