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언제나 짙은 그림자처럼 제국을 덮쳤다. 태양 제국. 이름만 들으면 눈부신 황금빛이 떠오르지만, 이 땅의 백성들에게 태양은 지친 등을 태우는 가혹한 불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황금성은 높은 담장과 빛나는 첨탑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그 안에서 피어나는 탐욕스러운 꽃잎들로 거대한 제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르신, 오늘도 수확이 영 시원찮습니다.”
허리 숙인 노인의 목소리에는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한숨이 섞여 있었다. 유월은 그 말을 들으며 한낮의 시장통을 바라봤다. 썩어가는 채소 한 조각을 놓고도 실랑이가 벌어지고, 감시단의 눈초리를 피해 몰래 품속에 쌀 한 줌을 숨기는 이들이 있었다. 백성들의 얼굴에는 공통된 병색이 엿보였다. 햇빛병. 제국은 그저 ‘볕에 너무 노출되어 생기는 흔한 질병’이라 치부했지만, 유월의 눈에는 단순한 병이 아니었다. 피부는 바싹 마르고, 기력이 쇠하며,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이었다. 그리고 이 병은 유월의 동생마저 앗아갔다.
며칠 전, 유월이 일하는 작은 약재상으로 이웃집 아이가 실려왔다. 겨우 일곱 살, 늘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은 햇빛병으로 완전히 쭈그러들어 있었다.
“유월 누나… 목이 너무 말라…”
아이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는, 그 다음 날 새벽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비탄에 잠긴 부모가 아이의 몸을 거두려 하자, 감시단이 들이닥쳤다.
“햇빛병은 전염성이 강하다! 시신은 제국의 지시에 따라 특별 처리한다!”
감시단장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이의 부모는 절규하며 매달렸지만, 몽둥이질에 쫓겨날 뿐이었다. 감시단은 아이의 시신을 포대에 담아 싣고 홀연히 사라졌다. 제국의 법은 늘 그러했다. 정당한 이유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도 없었다.
유월은 감시단이 사라진 골목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전염성이 강하다고? 감시단은 맨손으로 아이를 만졌는데?”
늘 어딘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햇빛병. 그리고 제국의 과도한 개입. 유월의 심장에 잊었던 불씨가 타올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제국의 하급 서기관이었으나, 황금성 내부의 비리를 파헤치려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때 유월은 겨우 열 살이었다. 어른들의 무력함 속에 잊힌 아버지의 죽음, 동생의 죽음, 그리고 억울하게 끌려간 이웃집 아이의 시신까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유월은 시장 구석의 낡은 주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이 모이는 음지였다. 어두운 구석 테이블에 앉아 막걸리를 홀짝이는 늙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한 선생.”
한 선생은 제국에서 파직당한 전직 학자로, 제국의 모든 악행을 기록하고 있다고 떠벌리는 괴짜였다. 유월은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의 기록 일부를 본 적이 있었다.
“오, 아가씨. 웬일이시오? 늘 어두운 곳에선 멀리 떨어지라더니.”
한 선생은 비스듬히 유월을 올려다봤다. 쉰 목소리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햇빛병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유월의 질문에 한 선생의 눈빛이 순간 예리해졌다.
“햇빛병이라… 흔한 병 아니었나? 제국의 발표로는 그렇던데.”
“아닙니다. 감시단이 죽은 아이의 시신을 가져갔습니다. 전염성이 강하다는 핑계로요. 그런데 그들은 맨손이었습니다.”
한 선생은 턱수염을 쓸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흥미롭군. 제국은 늘 거짓말쟁이였지. 특히 무언가를 감추려 할 때 더욱.”
“아버지도 햇빛병에 대해 조사하시던 중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 서재에서 햇빛병과 ‘기운’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운이라니! 자네 아버지는 역시 범인이었어! 그렇다면 제국이 뭘 하는지 알아냈을지도…!”
그는 몸을 바짝 당겨 속삭였다.
“햇빛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네. 제국이 백성들에게서 생기를 뽑아내는 방식이지. 황금성 지하에는 ‘태양석’이라는 고대의 유물이 있다고 들었네. 제국의 힘의 원천이라고.”
유월은 충격에 휩싸였다. 생기를 뽑아낸다니. 그럼 백성들은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아이의 시신은… 그 태양석에 바쳐진 겁니까?”
“확실친 않네. 하지만 그들의 행태로 미루어 짐작컨대, 병든 자의 생기가 가장 쉽게 뽑히는 모양이야. 혹은, 그 시신 자체로도… 크흠.”
한 선생은 뒷목을 긁적였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입니까? 황금성 지하…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 않습니까.”
“들어갈 수 없진 않아. 들어가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그때였다. 덩치 큰 사내가 유월의 테이블에 불쑥 다가왔다.
“유월 아가씨가 뭘 찾는지 대충 들었습니다. 저도 제국의 개 같은 놈들에게 가족을 잃었습니다. 돕겠습니다.”
그는 이웃 마을의 우직한 농부, 돌쇠였다. 힘은 장사지만, 늘 억눌려 살던 그였다.
“돌쇠님… 위험한 일입니다.”
“이미 잃을 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요.”
돌쇠의 눈에는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유월은 한 선생과 돌쇠를 주축으로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시작했다. 밤마다 시장 골목의 허름한 창고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계획을 짰다. 한 선생은 과거 제국에서 일했던 인맥을 통해 황금성의 도면 일부와 태양석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냈다. 태양석은 제국의 심장부에 위치하며,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는 유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번영의 이면에는 백성들의 피와 땀, 그리고 생기가 필요하다는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태양석은 백성들의 생기가 제단에 모일수록 더 강한 힘을 낸다고 합니다. 아마 햇빛병에 걸린 시신들을 가져가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겁니다.”
유월은 한 선생의 고서에 적힌 희미한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림에는 거대한 수정 같은 돌 주위로 빛줄기가 흡수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태양석을 파괴한다면, 제국은 힘을 잃을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햇빛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돌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습니다. 그럼 어떻게 침입하죠?”
침입 경로는 한 선생이 찾아낸 낡은 도면에서 단서를 얻었다. 황금성 지하에는 과거 비상시 탈출을 위한 비밀 통로가 있었고, 이 통로는 성 밖에 위치한 오래된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배수로의 입구가 감시단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동시에 최대한 많은 백성의 동참을 유도해야 합니다.”
유월은 며칠 밤낮으로 고민했다. 제국의 탄압에 잔뜩 겁먹은 백성들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한 선생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제국은 곧 ‘풍요제’를 엽니다. 백성들에게 거짓된 풍요를 선전하는 날이지. 그날, 황금성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겁니다.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돌쇠가 펄쩍 뛰었다.
“맞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움직일 거야.”
유월은 한 선생의 말에 동조했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의 불씨였다.
풍요제 당일, 황금성 앞 광장은 제국의 군대가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가운데, 강제로 끌려온 백성들로 가득 찼다. 대신 시리우스가 황금색 휘장을 두른 채 연단에 올라섰다. 그의 얼굴에는 거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백성들이여! 태양 제국의 은총으로 우리는 오늘도 풍요롭고 안전하다! 이 모든 것이 황제 폐하의 위대한 통치 덕분이다!”
그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광장에 울려 퍼지자, 백성들의 얼굴에는 공허한 눈빛만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광장 한쪽에서 돌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짓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햇빛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느새 군중 속으로 잠입한 돌쇠와 몇몇 동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소란에 군인들이 제지하러 움직였다. 그 순간, 광장 곳곳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리의 생기를 빼앗아가는 악마다!”
“황금성에 죽은 아이들의 시신이 쌓여있다!”
분노와 절규가 뒤섞인 함성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군중은 삽시간에 동요했고, 군인들은 당황한 듯 허둥댔다. 백성들의 분노는 억눌렸던 불씨처럼 한순간에 타올랐다. 이 혼란을 틈타, 유월과 한 선생은 미리 약속된 배수로를 통해 황금성 지하로 잠입했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통로를 한참 걸었을까,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 선생이 도면을 보며 낡은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고대의 잠금장치는 오히려 단순하지.”
그는 익숙한 손길로 자물쇠를 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기이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여기가… 태양석 제단이군.”
유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지하 공간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처럼 빛나는 돌이 놓여 있었다. 그 돌에서는 옅은 푸른빛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천장의 수많은 관과 연결되어 황금성 전체로 뻗어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돌 아래, 수많은 관이 연결된 곳에는…
“이럴 수가…!”
유월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태양석 아래에는 투명한 유리관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안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신들이 갇혀 있었다. 아이의 것인지, 노인의 것인지 분간도 어려운 말라 비틀어진 육신들이었다. 이웃집 아이의 시신도, 동생의 시신도 저곳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태양석은 그들의 생기를 빨아먹고 있었다. 이 모든 잔혹함의 심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멈춰라!”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대신 시리우스였다. 그의 뒤에는 황금 갑옷을 입은 정예 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감히 미천한 것들이 제국의 심장에 침범하다니!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감히!”
시리우스는 조롱하듯 웃었다.
“우리는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뿐이다. 너희 백성들은 그저 이 거대한 기계의 부품일 뿐!”
“헛소리 마라!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한 번영 따위는 필요 없어!”
유월은 손에 든 낡은 등불을 들어 올렸다. 태양석의 빛과 시신들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
“우리는 당신들이 앗아간 모든 생명을 위해 싸울 것이다!”
시리우스가 손짓하자,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였다. 지하 통로 반대편에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돌쇠가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제단 근처에서 발견한 묵직한 철봉이 들려 있었다.
“이 개자식들! 내 가족의 피를 갚아주마!”
돌쇠는 거친 기세로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우직한 힘은 훈련된 기사들에게도 만만찮은 위협이었다. 유월은 재빨리 한 선생에게 속삭였다.
“태양석을 파괴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한 선생은 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것은 고대 유물이라 물리적인 충격으로는 파괴하기 어려워. 오히려 에너지를 과부하시켜야 해! 생기를 끌어당기는 핵심 봉인부를 건드려야 한다!”
그는 태양석 옆에 있는 작은 제어 장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월은 돌쇠가 기사들과 싸우는 틈을 타 태양석으로 달려갔다. 대신 시리우스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한 선생이 몸을 던져 그를 저지했다.
“아가씨! 서둘러!”
시리우스의 주먹이 한 선생의 얼굴을 강타했다. 한 선생은 피를 흘리면서도 유월을 향해 소리쳤다.
유월은 제어 장치에 손을 댔다. 고대 문자들이 새겨진 장치였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에서 보았던 문자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생기의 흐름을 역전시켜라. 빛은 곧 어둠이 되리니.’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장치의 핵심을 뒤틀었다.
푸른빛을 뿜어내던 태양석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태양석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역류하며 주변을 뒤흔들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지하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리우스와 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유월은 한 선생과 돌쇠의 손을 잡고 무너져 내리는 통로를 필사적으로 빠져나왔다.
황금성 광장. 태양석의 파괴로 인해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고, 황금성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자, 광장에 모였던 백성들은 경악과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제국의 심장이 붕괴한 것이다.
유월과 한 선생, 돌쇠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광장으로 뛰어나왔다. 백성들은 그들을 보며 일제히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유월이다! 태양석을 파괴했다!”
“이제 우리도 살 수 있다!”
오랜 억압 속에서 잊었던 희망의 불씨가 사람들의 눈에서 타올랐다. 황금성에서는 비명과 함께 혼란에 빠진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태양 제국은 더 이상 무적의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국은 곧 재정비하여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는 희망과 용기,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굳건한 의지가 들려 있었다. 유월은 찢어진 옷을 입은 채 고통과 희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새벽의 여명이 어둠을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비록 길고 험난한 여정이 될 테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막 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