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삐걱이는 침묵**
도시의 심장은 오래전에 멎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구조물들은 녹슨 관짝처럼 섰고, 그 속에서 나는 마지막 맥박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 아파트 12층, 한때는 꿈과 활기로 가득 찼던 공간은 이제 적막과 먼지로 뒤덮인 요새가 되었다. 창문은 두꺼운 합판과 천으로 봉쇄되어 바깥세상의 지옥도를 가려주었다. 빛은 태양 대신 낡은 랜턴의 노란 불빛에 의지했고, 소리는 세상의 모든 비명과 고통이 담긴 침묵으로 채워졌다.
지후는 깡통 수프를 데우기 위해 작은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하는 가스 타는 소리가 이 침묵 속에서 기이하게 크게 울렸다. 손톱 밑에 낀 흙먼지를 긁어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달째 이 생활인지, 아니 몇 년째인지도 이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시간의 개념마저 퇴색된 지 오래였다.
뜨거운 수프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비릿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한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저렴한 깡통 수프가 지금은 더없이 귀한 만찬이었다. 국물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탁.
작은 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들렸다. 지후는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던 책장. 그 위에 꽂혀 있던 낡은 소설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특별히 건드린 기억이 없는데.
“바람인가…”
그는 중얼거렸다. 밀폐된 아파트에 무슨 바람이 들겠냐마는, 그가 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였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이따금 찾아오는 현기증과 두통은 영양 불균형 때문이라고 의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의사도 지금쯤은…
지후는 떨어진 책을 주워 다시 책장에 꽂았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책 표지에는 오래된 그림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책장은 삐걱이는 소리를 낼 정도로 낡아 있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수프를 마저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거실과 연결된 방문이 느리게 열리는 소리였다. 잠겨있던 문인데.
지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애써 불안감을 지우려 했다. 오래된 아파트이니 문틈이 벌어져서 저절로 열린 것이겠지. 혹은 지진이라도 난 건가? 가끔 멀리서 느껴지는 진동은 아직 이 도시가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호였다.
랜턴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삐걱이며 열린 문틈 사이로 어둠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랜턴 불빛을 문 안으로 비췄다. 침실이었다. 이불은 뒤엉켜 있었고, 옷가지들은 흐트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어제 떠났던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없잖아.”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저 혼자 지내면서 생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종종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문을 다시 닫고, 이번에는 잠금쇠가 제대로 걸렸는지 두어 번 확인했다. 찰칵. 확실히 잠겼다.
안심하고 돌아선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덮쳤다. 동시에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섬뜩하리만큼 낮은 목소리. 마치 낡은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처럼, 혹은 바람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내는 울음소리처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후는 분명히 들었다.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후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침실 문. 아까 분명히 잠갔던 그 문이… 다시 활짝 열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는 랜턴을 들고 문 안쪽을 향해 냅다 불빛을 쏘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침실. 어제와 다름없는 풍경. 하지만 아까 들었던 목소리는? 그리고 저절로 열린 문은?
지후는 더 이상 합리적인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이성적인 사고회로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은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채 뻣뻣하게 굳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서, 방 중앙에 놓여있던 낡은 나무 의자가 갑자기 삐걱거리며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의자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의자는 사람의 키만큼 높이까지 떠올랐다.
지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현실이 아니었다. 악몽이었다. 길어진 생존의 나날이 결국 그의 정신을 파괴한 것일까?
의자가 공중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지후를 향해 돌아섰다. 마치 의자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앉아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랜턴 불빛이 떨리는 손에서 흔들렸다. 지후는 뒷걸음질 쳤다. 숨이 막혔다. 이 아파트가, 이 지긋지긋한 요새가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죽은 자들의 도시였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이런 기괴한 공포는 없었다. 그저 생존을 위한 투쟁만이 있었을 뿐.
의자는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점차 속도를 더하며, 마치 조롱하듯이. 그리고 이내 지후를 향해 돌진했다.
“크악!”
지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의자는 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벽에 부딪혔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낡은 나무 의자는 산산조각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충격으로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떨어져 깨졌다.
조각난 의자의 잔해들 사이에서, 지후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숨을 헐떡였다. 그의 등은 차가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와 함께 이 아파트에 갇혀 있었고, 이제 그것은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깨진 액자의 유리 파편 위로 랜턴 불빛이 반사되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지후는 희미하게 비치는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마치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하지만 분명히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는… 무언가가, 파편 위에서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아파트에 드리운 침묵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삐걱거리고, 속삭이고, 그리고 울부짖었다.
지후는 온몸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는 생존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바로 이 아파트 자체가 그의 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