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은 녹슨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천장을 올려다봤다. 잿빛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몇 달째인지 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손목의 HUD가 깜빡이며 배터리 잔량을 경고했다. 젠장, 또다시.
인벤토리 창을 열자, ‘정수된 물’은 한 병, ‘건조 식량’은 겨우 두 개. ‘붕대’는 너덜너덜한 한 뭉치뿐이었다. 탄약은? ‘구식 리볼버 탄약’ 다섯 발. 끔찍한 잔고였다. 이 정도로는 오늘 밤을 넘기기도 힘들 텐데.
그는 ‘세이프 가든’이라는 이름만 거창한, 폐허가 된 도시 외곽의 지하 벙커로 향하는 중이었다. 소문으로는 그곳에 아직 온전한 정수 시설이 남아있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니, 잡을 지푸라기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그저 한 줄기 허황된 희망을 좇는 것에 가까웠다.
낡은 백화점 건물 내부, 깨진 쇼윈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발밑에는 유리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밟혔다. 카인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끽, 끽. 삐걱이는 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 금속 파편과 살점이 뒤섞인 기괴한 형태의 짐승, ‘융합체’였다. 놈의 등에서는 녹슨 철근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고, 한쪽 팔은 자동차 엔진처럼 불룩했다. 희미한 붉은 눈이 사방을 훑고 있었다. 놈은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그 육중한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젠장. 이런 곳에서 융합체를 마주치다니.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탄약도, 체력도 바닥이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은신’ 스킬을 발동하며 조심스럽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스킬 ‘은신(Lv.2)’ 발동. 주변 인지 저하.]
발소리를 죽이고 벽을 따라 움직였다. 융합체는 느리지만 끈질겼다. 놈의 움직임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이라도 들키면 끝장이었다. 놈은 천천히, 마치 먹잇감의 흔적을 쫓는 것처럼 매장 진열대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진열대에 부딪혀 떨어진 유리 조각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카인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출구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겨우 몇 걸음을 옮겼을까.
갑자기 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킁, 킁. 쇠 냄새와 썩은 내음이 뒤섞인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놈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젠장…!”
결국 실수하고 말았다. 발밑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밟았다. 쨍그랑!
융합체의 붉은 눈이 정확히 카인을 향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바닥의 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피할 곳은 없었다. 카인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탕! 탕! 두 발을 놈의 붉은 눈을 향해 쏘았다. 첫 발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발은 놈의 쇠붙이 피부에 박혔다. 끄아아아앙!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놈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분노하며 돌진해왔다.
몸을 날려 옆에 있던 무너진 진열장 뒤로 숨었다. 꽝! 진열장이 박살 나며 그의 어깨에 날카로운 파편이 박혔다.
[데미지 5. 출혈 상태 이상 발생.]
젠장, 젠장, 젠장! 망할. 카인은 인벤토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섬광탄’을 꺼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핀을 뽑아 놈이 돌진해오는 길목에 던졌다. 콰앙!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 번쩍였다. 융합체가 잠시 주춤하며 끔찍한 고통 소리를 질렀다.
그 틈을 타 카인은 미친 듯이 달렸다. 붕괴 직전의 에스컬레이터를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낡은 철골이 비명을 질렀다. 굉음이 연이어 터졌지만, 뒤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구에 다다랐다.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발밑에 뭔가 딱딱한 것이 밟혔다.
카인이 숨을 멈췄다. 그것은 닳고 닳은 가죽 지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찢어진 ID 카드와 함께, 낡은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종이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이프 가든은… 함정이다. 북쪽… 광산…”**
카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유일한 희망, ‘세이프 가든’이 함정이라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쫓던 희망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북쪽 광산’이라는 곳은 또 어디를 말하는 거지?
뒤에서 융합체의 끔찍한 포효가 다시 울려 퍼졌다. 놈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박혔다. 카인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움켜쥐었다.
선택해야 했다. 희망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이 알 수 없는 경고를 믿고 새로운 위험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잿빛 세상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