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붉은 모래 바람 속 그림자
붉은 모래 평원의 바람은 언제나 사나웠다. 모래는 칼날처럼 피부를 스쳤고, 끝없이 펼쳐진 황야는 망각의 장막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런 황량함 속에서도 한 사내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닳고 닳은 가죽 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은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등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기다란 것이 비스듬히 메어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진(無辰).
어느 누구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한번 목표를 정하면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는 것과, 그의 검술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만이 간간이 무림에 떠돌 뿐이었다.
수평선에 해가 기울자, 거대한 바위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무진은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낮 동안 작열하던 태양의 열기가 사라지고, 밤의 한기가 서서히 대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위산 아래 움푹 파인 동굴 어귀에 다다랐다. 이곳은 붉은 모래 평원 중앙에 위치한 유일한 오아시스, ‘고요의 샘’이라 불리는 작은 쉼터였다. 작고 허름한 주루(酒樓)가 고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주루 안은 붉은 모흙 벽난로의 불꽃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고작 서너 명의 늙은 상인들과 짐꾼들이 웅성이고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탁자 위에 놓인 투박한 나무잔에 든 맹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어둠이 아닌, 벽난로 옆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백발의 노인에게 닿았다. 노인의 눈빛은 흐릿했지만, 간혹 번뜩이는 섬광이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했다.
잠시 후, 노인은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놈의 술도 예전 같지가 않아. 혀끝에서 맴도는 씁쓸함이 꼭 이놈의 인생 같구나.”
무진은 조용히 일어나 노인의 탁자로 다가갔다.
“어르신, 혼자 드시기에 외로우실 듯하여.”
노인은 고개를 들어 무진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젊은 것이 웬 오지랖이냐. 허나, 그 눈빛이 제법 날카롭군. 어디, 술이나 한잔 따라 보아라.”
무진은 노인의 술잔에 맑은 증류주를 채웠다. 노인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껄껄 웃었다.
“이만하면 되었느냐?”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무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허허, 역시. 사내들이 이유 없이 술잔을 권하는 법은 없지. 무엇이 궁금하냐?” 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사흘 길을 가면, ‘잊혀진 지하 유적’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주루 안의 모든 소란이 순간 멈춘 듯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 노인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스쳤다.
“떠도는 소문일 뿐입니다.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술잔을 내려놓더니,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젊은이, 가지 마라. 그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아서는 아니 될 곳이다.”
“이유가 있습니까?”
“수백 년 전, 아니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 붉은 모래 평원 아래,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 그곳은 고대의 강력한 문명이 사라지며 남긴 유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장소라고들 하지.”
“저주라니요?”
“그곳에 들어간 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오더라도 미치광이가 되어 헛소리만 지껄였다. 혹은 몸이 돌처럼 굳어져버리거나,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갔지. 사람들은 그곳을 ‘검은 심연’이라 불렀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저는 그 심연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합니다.” 무진의 눈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집불통이로군. 허나, 나도 젊은 시절엔 그랬지. 좋다. 굳이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몇 가지는 알아두어야 할 거다.”
노인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벽난로의 불빛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다. ‘바람의 회랑’을 지나 ‘망자의 숲’을 거쳐야만 한다. 무엇보다, 입구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울 터. 평원 북쪽 끝, ‘거인의 절벽’이라 불리는 곳에 숨겨진 문이 있다 전해진다. 하지만 단순한 바위산이 아닐 게다. 낡은 고문서에 이르기를, 밤이 되면 하늘의 별자리가 문을 가리킨다 했지. 북쪽 하늘에 떠오르는 ‘용의 눈물’ 별자리가 가장 밝게 빛날 때, 문이 드러날 것이다.”
“용의 눈물이라…” 무진은 나직이 읊조렸다.
“명심해라, 젊은이. 그 안에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현명할 게다.”
다음 날 새벽, 무진은 붉은 모래 평원 북쪽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노인의 경고는 그의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모래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의 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흘 밤낮을 걸어, 마침내 무진은 노인이 말했던 ‘거인의 절벽’에 다다랐다. 거대한 바위산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다. 절벽 아래는 거센 모래폭풍이 휘몰아쳐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무진은 경공(輕功)을 펼쳐 바람을 가르며 절벽 중턱에 위태롭게 섰다. 날카로운 눈으로 절벽 곳곳을 살폈으나, 노인이 말한 ‘숨겨진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은하수가 찬란하게 펼쳐졌다. 노인이 말한 ‘용의 눈물’ 별자리를 찾기 위해 무진은 깊은 내공(內功)으로 시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이 용의 눈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용의 눈물’ 별자리의 빛이 절벽의 한 지점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빛의 손가락이 어둠 속의 비밀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무진은 그 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의 암반 한가운데, 미세하게 빛나는 균열이 보였다. 얼핏 보면 그저 바위의 결처럼 보였지만, 무진의 예리한 감각은 그것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균열은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지만, 안쪽에서 희미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기운, 그러나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듯한 기운.
무진은 오른손을 들어 균열에 대었다. 손바닥에서 뜨거운 내공이 흘러나갔다. 그의 내공이 닿자,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이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위가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 동안 붉은 모래와 바람에 깎이고 퇴색되었지만, 고대 문명의 흔적이 역력한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 뒤에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쿰쿰한 흙냄새, 그리고 오랫동안 갇혀있던 비밀의 냄새가 밀려 나왔다.
무진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는 허리에 찬 작은 등불을 꺼내 불을 붙였다. 등불의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가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수백 개의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쪽으로는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형상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기괴한 조각상들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무진을 노려보는 듯했다. 계단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고, 그 문자들 사이사이에는 잊혀진 문명의 상징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래에서는 알 수 없는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나 냄새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이 응축된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무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내공이 조용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천으로 감싸두었던 등 뒤의 것을 천천히 풀어냈다. 단단한 검집에 든 검, ‘흑영(黑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기가 등불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뜩였다.
“이곳이로군… 검은 심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첫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미지의 지하 유적이, 그에게 숨겨왔던 수천 년의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