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먼지가 바람에 실려 흩날렸다. 한때 거대한 빌딩의 잔해였을 콘크리트 기둥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 그림자 아래, 임시변통으로 쌓아 올린 흙벽과 찢어진 천막들이 위태롭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심판의 아레나’라 불리는 곳이었다. 문명은 무너졌고, 인류는 파편처럼 흩어졌으나, 이 잔혹한 세상에도 변치 않는 진리가 하나 있었다.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 힘을 가리는 최후의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은호는 흙먼지 낀 관중석 한 귀퉁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백의 눈동자들이 아래의 원형 투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대보다는 체념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의 눈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이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무림 고수’들이었다.
“젠장, 또 시작이군.”
은호의 옆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형인 강민이었다. 강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지쳐 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이긴다고 세상이 변할까? 어차피 우린 계속 죽어나갈 텐데.”
“그렇지 않아, 사형.” 은호는 작게 반박했다. “승자는 ‘새벽의 문’을 열 권한을 얻어. 그곳에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대지가… 인류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있어.”
강민은 코웃음을 쳤다. “희망? 희망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어. 저들 중 누가 이기든 결국은 또 다른 피바람만 불어올 뿐이야.”
은호는 강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투기장 중앙에 서 있는 두 인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첫 경기의 선수들이었다. 한 명은 잿빛 도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이름은 ‘철권 대사형’. 잊혀진 ‘구문파’의 마지막 계승자로, 강철 같은 주먹으로 모든 것을 부순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이름은 ‘흑영검’. 고아 출신으로 혼자서 무공을 깨쳤다는데,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차가워서 한 번 휘두르면 상대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할 새도 없이 쓰러진다고 했다.
“흥, 결국 저런 괴물들의 피 튀기는 싸움인가.” 강민이 또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뭘 할 수 있지?”
“우린… 그들을 지켜봐야 해.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저곳에 설 준비를 해야지.” 은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주먹은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져 있었다. 그의 작은 문파는 이미 사냥터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새벽의 문’은 은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쉰 목소리의 심판이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경기, 철권 대사형 대 흑영검! 준비, 시작!”
투기장 주변을 둘러싼 거친 천막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바람은 왠지 모르게 비릿한 피 냄새를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철권 대사형이 먼저 움직였다. 늙었지만 그의 몸놀림은 산처럼 묵직하고, 동시에 대지처럼 견고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투기장의 흙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는 아무런 기술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먹을 쥐고, 그 주먹에 모든 기운을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은호는 그것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는 무공.
반면 흑영검은 한 줄기 그림자 같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이미 철권 대사형의 사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검은 번개처럼 뽑혔다. 쉭,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명확한 궤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잔상만이 그의 움직임을 간신히 뒤쫓을 뿐이었다.
“저게 흑영검의 ‘무영검(無影劍)’이군.” 강민이 숨을 들이켰다. “말 그대로 그림자조차 없는 검이라더니… 정말 보이는 게 없어.”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은 흑영검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과 철권 대사형의 숨겨진 기운 흐름을 동시에 쫓으려 애썼다. 흑영검의 검은 철권 대사형의 묵직한 방어를 비집고 들어가 그의 빈틈을 노렸다. 날카로운 검기가 늙은 도포 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철권 대사형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주먹질이었으나, 그 안에는 산을 부술 듯한 엄청난 내공이 담겨 있었다. 흑영검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철권 대사형은 다시 한 발짝 내딛으며 흑영검의 경로를 차단했다.
“저게 바로 ‘파산권(破山拳)’이야.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수는 권법.” 은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눈앞의 대결에서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흑영검은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검을 허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철권 대사형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차가운 안개처럼 변하여 투기장을 뒤덮었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무슨 짓이지? 저건… 무공이 아닌데?” 강민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것은 무공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 재앙의 시대에 발견된, 오염된 기운을 변형시켜 사용하는 사악한 기술들 중 하나였다. 이른바 ‘변이 기술’.
철권 대사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척과 흐름에 의지하여 움직였다. 주먹을 쥐고, 마치 거대한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처럼 투기장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다.
흑영검은 그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더욱 예측 불가능해졌고, 안개 속에서 그의 검은 마치 수십 자루가 동시에 번뜩이는 환영처럼 보였다. 챙! 챙! 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흑영검의 검이 철권 대사형의 팔뚝, 어깨, 옆구리를 쉼 없이 노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공격은 늙은 대사형의 단단한 피부에 막히거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방어막에 튕겨져 나갔다.
“저 노인… 저런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어!” 강민이 경악하며 말했다.
은호는 숨을 멈췄다. 철권 대사형의 몸은 마치 살아있는 강철 같았다. 그의 무공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온몸을 거대한 방패로 바꾸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 흑영검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했다. 그는 분명히 지쳐가고 있었다. 변이 기술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은호는 알고 있었다. 흑영검은 초조해 보였다.
그 순간, 철권 대사형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안개 속에서도 흑영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늙은 노인의 입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 붙였다가, 마치 거대한 종을 치듯 양손을 동시에 벌렸다.
콰아아앙!
공기조차 휘어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파가 투기장 전체를 강타했다. 철권 대사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내공이 안개를 산산조각 내며 사방으로 흩뿌렸다. 흑영검의 변이 기술이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공의 폭풍에 휘말린 흑영검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된 듯 보였다. 철권 대사형의 공격은 물리적인 타격만이 아니었다. 그의 파산권은 상대의 내공 흐름을 뒤흔들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흑영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다시 검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팍을 긋더니, 붉은 피를 검신에 발랐다. 그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크윽…! 저건… 금지된 술법이잖아!” 강민이 경악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서 힘을 끌어내는 주술!”
흑영검의 검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강력해 보였다. 그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철권 대사형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은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되어,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철권 대사형의 심장을 노렸다.
“하아압!”
철권 대사형은 묵묵히 그 공격을 받아냈다. 그의 두 주먹이 흑영검의 검과 충돌했다. 붉은 검기가 그의 육신을 꿰뚫으려 했으나, 늙은 노인의 몸은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버텨내고 있었다. 피가 튀었다. 늙은 대사형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철권 대사형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흑영검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그 충격은 흑영검의 어깨를 그대로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흑영검의 몸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그의 붉게 물들었던 눈빛은 다시 공허한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검은 손에서 떨어져 나와 차가운 흙바닥에 박혔다.
심판의 쉰 목소리가 투기장을 갈랐다. “승자, 철권 대사형!”
환호성은 없었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치열하고 잔혹한 싸움은 그들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것 같았다. 승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서 있었고, 패배자는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철권 대사형의 강함은 경이로웠으나, 흑영검의 처절한 투혼 또한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무공 대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신념과 생존을 건 처절한 절규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수많은 고수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은호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과연 이 잔혹한 아레나에서 살아남아 ‘새벽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