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그림자
숨 쉬는 것조차 사치가 된 세상이었다. 지아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를 긁어모은 천 조각으로 입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잿빛 하늘 아래,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했다. 아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찢어지는 비명은 이곳이 여전히 죽은 자들의 영역임을 뼈저리게 상기시켰다.
다 닳은 등산화는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삐걱거리는 발목을 지탱하며 지아는 폐허가 된 마트를 향해 나아갔다. 몇 달 전, 누군가 이곳에서 통조림을 챙기는 것을 봤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은 종종 죽음을 부르지만, 때로는 희망의 조각이 되기도 했다. 지금 지아에게는 그 희망의 조각이 절실했다. 배 속에서는 며칠째 잠자고 있던 굶주림이 아우성쳤다.
낡은 철제 셔터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미 다녀갔거나, 아니면 저 안에서 그들이 깨어나 지친 사냥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아는 손에 쥔 식칼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방패였다.
“후으읍…”
작게 숨을 들이쉬고, 지아는 셔터 문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어둠에 잠긴 마트 안은 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선반은 무너져 내렸고, 진열되었던 상품들은 바닥에 나뒹굴며 부패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이었다.
“아무것도 없네…”
희미한 희망이 사그라드는 순간, 지아의 등 뒤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진 팔, 축 늘어진 옷가지, 그리고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이성을 잃은 텅 빈 눈동자였다.
“젠장…”
하필이면, 또다시. 지아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느릿느릿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둘, 셋, 그리고 더 많은 숫자들을 불러냈다. 지아는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이리 와, 이 쓰레기 같은 것들아!”
지아는 일부러 도발하며 식칼을 휘둘렀다. 첫 번째 녀석의 목을 노리고 칼을 내리찍었다. 썩어가는 살덩이를 가르는 불쾌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다른 놈들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지아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옆구리를 스치는 팔, 그리고 귓가를 찢는 끔찍한 울음소리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는 늘 날카로워졌다. 무너진 진열대를 발판 삼아 뛰어오르고, 빈틈을 노려 칼을 찔러 넣었다. 하나, 둘. 쓰러지는 놈들이 늘어갔지만, 그 수는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지아에게 달려들던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일반적인 놈들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와 힘이었다. 놈의 목을 부러뜨리듯 비틀어 던져버린 그것은,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지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다른 놈들처럼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아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을 향해 낮은 으르렁거림을 내뱉었다. 그 소리는 마치 위협과 경고를 담고 있는 듯했다. 지아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은 공포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놈들보다 훨씬 키가 컸고, 피부는 죽은 듯 창백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른 놈들처럼 몸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는 아니었다. 마치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아니면 너무나 오래 굶주려서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
텅 비어 이성을 잃은 다른 놈들의 눈과는 달랐다.
그것의 눈은 마치 깊은 심해처럼 검고 깊었다. 감정은 없었지만, 묘한 응시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마치 관찰하는 듯한, 아니면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뭐야, 너…”
지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른 놈들이 그 회색빛 그림자의 위협적인 행동에 주춤거리는 사이, 그것은 천천히 한 발자국, 지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멈춰 섰다. 그와 지아 사이에는 불과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가 놓여 있었다.
주변의 놈들은 여전히 그르렁거렸지만, 그 회색 그림자를 넘어서 지아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마치, 마치 두목에게 복종하는 개들처럼. 지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감염된 것들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었다.
그것의 검은 눈동자가 지아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식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하며, 동시에 도망칠 퇴로를 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그 깊은 눈으로 지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기묘한 정적이 마트 안을 가득 채웠다.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흙먼지 속에서 지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 회색빛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무너진 진열대를 박차고 마트의 깨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마치, 지아에게서 등을 돌리듯. 그 엄청난 움직임에 주변의 놈들은 다시 한번 비명을 내뱉으며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을 틈타 지아는 간신히 몸을 돌려 셔터 문 틈새로 뛰쳐나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아는 잿빛 도시의 골목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폐허가 된 건물들과 쓰러진 자동차들을 지나쳐 한참을 달린 후에야 겨우 낡은 콘크리트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철제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자,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려버렸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금 전 마트 안에서 겪었던 기이한 경험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그 녀석은 날 공격하지 않았을까.
왜, 다른 녀석들을 막아섰을까.
그리고 그 눈동자는 대체…
지아는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놈들을 상대해왔지만,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인 녀석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반적인 놈들과는 뭔가 달랐다. 마치… 마치 지능이 있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감염된 것들에게 이성이나 지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굶주림과 본능에 지배당하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회색빛 그림자의 깊은 눈동자는 어쩐지 계속 지아의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크르르르릉…”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낮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아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콘크리트 벽 너머, 그림자처럼 서 있는 그것의 모습에 지아는 숨을 멈췄다.
그 회색빛 그림자는, 잿빛 하늘을 등지고 서서,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는 깊은 눈으로 지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녀를 쫓아온 듯이.
그리고 지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부터, 그녀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발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 기이한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 알 수 없는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지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회색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