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회색 폐허의 속삭임】

“젠장, 물이 거의 다 떨어졌어.” 준의 거친 목소리가 찌푸린 미간 사이로 터져 나왔다.
강진은 낡은 양철통을 기울여 바닥에 고인 붉은 녹물을 확인했다. 며칠 전부터 내린 그 끈적하고 역한 ‘붉은 비’ 때문에 정수 필터가 완전히 망가져 버린 후였다. 그나마 남아있던 식수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유나 해열제도… 이제 한 알 남았어요.” 유나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이마를 짚던 강진의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유나는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열에 들떠 밭은 숨을 쉬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어떡해야 해, 강진? 이대로 가다간… 둘 다 죽을 거야.” 준이 벽에 기댄 채 낡은 엽총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짐승처럼 번뜩였다.

강진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빗물이 새어 들어 곰팡이와 이끼가 뒤엉킨 콘크리트 벽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병원… 기억나? 남쪽 외곽에 있던 대형 병원.” 강진의 말에 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기? 미쳤군. 그쪽은… 아니라고 했잖아. 예전에 거기로 가려던 정찰대가 통째로 증발했다고.”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식수 필터를 찾고, 유나에게 줄 약을 찾아야 해. 이곳에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강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어떤 논리보다 강했다. 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좋아.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철수다. 난 그 빌어먹을 괴물들한테 내 살을 뜯길 생각 없어.”
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그 단어는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알 수 없는 것들을 통칭하는 편리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잿빛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붉은 비는 멎었지만, 세상은 온통 핏빛으로 물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건물 잔해들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으스스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강진은 녹슨 칼을 꽉 쥐었다. 준은 엽총을 어깨에 메고 앞장섰다. 유나는… 유나는 열이 더 심해져 결국 동행할 수 없었다. 그녀를 남겨두고 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그녀를 끌고 가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뿐이었다. 강진은 떠나기 전 유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꼭 돌아올게.’
폐허가 된 거리를 가로지르며 그들은 이따금 기괴한 풍경과 마주쳤다. 길바닥에 엉겨 붙은 검붉은 곰팡이, 기형적으로 자라난 식물들,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알 수 없는 문양들. 그것들은 마치 태고의 언어처럼 복잡하고 불길했다.
준이 갑자기 멈춰 섰다.
“뭐야?” 강진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저기… 저 건물.” 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그들이 목표로 삼은 병원이었다. 그러나 병원은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병원 외벽을 뒤덮은 넝쿨들은 일반적인 식물이 아니었다. 짙은 보라색을 띠며,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넝쿨 사이사이에는 희끄무레한 액체가 맺혀 있었다.
“젠장, 더 심해졌잖아.” 준이 욕설을 뱉었다.

강진은 침을 삼켰다. 병원 입구는 녹슨 철문이 반쯤 열린 채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준, 내가 먼저 들어갈게. 뒤를 부탁해.”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은 조심스럽게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예상보다 더 어두웠다. 창문이 모두 부서져 있었지만, 바깥의 잿빛 햇살조차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듯했다.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어둠이었다. 공기는 습하고 끈적했다. 썩은 시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긋하지만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도를 따라 걷자 낡은 들것과 뒤집힌 휠체어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말라붙은 핏자국과 함께 알 수 없는 점액질이 굳어 있었다.
“여기 분명 뭔가 있었어.” 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들은 ‘응급의학과’ 표지판이 있는 곳을 지나 ‘약제실’을 찾았다. 약제실 문은 부서져 있었고, 내부는 온통 약병과 서류들이 뒤섞여 난장판이었다.
강진은 벽에 기대어 있던 약장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해열제… 소염제… 그리고… 정수 필터.”
다행히 몇 개의 약병과 아직 밀봉된 정수 필터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강진의 발밑에서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푹 꺼졌다.

강진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닥을 자세히 보니, 갈라진 틈 사이로 검붉은 뿌리 같은 것이 뻗어 나와 있었다. 그것은 아까 건물 외벽을 뒤덮고 있던 그 넝쿨과 흡사했다.
“젠장, 뭐야 저건?!” 준이 엽총을 겨눴지만, 그것은 공격할 수 있는 형체가 아니었다. 그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건물과 한 몸이 된 역겨운 생명체 같았다.
갑자기 건물이 전체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낮고 불길한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전신으로 전해졌다.
천장의 석고보드가 부서지며 먼지와 함께 기괴한 형상의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 하나는 마치 사람의 척추뼈처럼 뒤틀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눈알처럼 보이는 점액 덩어리였다.
“빨리!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가야 해!” 강진은 다급하게 외치며 약과 필터를 배낭에 쑤셔 넣었다.
건물의 진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지하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벽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아까 보았던 보라색 넝쿨들이 거미줄처럼 빠르게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도망쳐!” 준이 소리쳤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제실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가로지르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거대한 균열들이 벽에 생겨나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희미한 초록색 빛이 새어 나왔고, 그 안에서 수많은 작은 눈동자들이 자신들을 응시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지하에서 울리는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녹슨 철문은 이미 땅바닥에 완전히 쓰러져 있었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병원 건물 전체가 거대한 존재의 숨결처럼 크게 들썩였다.
“나가! 더 멀리!” 준이 강진을 잡아끌며 달렸다.
수백 미터를 정신없이 내달린 후에야 그들은 멈춰 설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병원 건물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보라색 넝쿨들이 뒤엉킨 거대한 잔해 더미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스스로를 삼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강진은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 쥔 배낭 안에는 유나를 살릴 약과 생존에 필수적인 필터가 들어 있었다. 임무는 성공했지만, 승리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준도 옆에 주저앉아 엽총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공포는 숨길 수 없었다.
“젠장… 저게 대체… 뭐였지?” 준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강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답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단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잿빛 구름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끔찍한 것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다시금 심장을 옥죄어 왔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이미 예전의 세상이 아니었다. 거대한 심연의 그림자가 모든 것을 뒤덮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