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화

이지훈은 사무실 책상에 놓인 한 장의 사진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사진 속에는 고즈넉한 풍경이 담겨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에워싼 작은 오솔길, 그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고택. 유명 화가 한지우의 작품 ‘시간의 결’에 영감을 준 장소로 알려진 곳이었다. 한지우는 몇 달 전부터 돌연 작업 활동을 중단했고, 그녀의 그림을 애타게 기다리던 갤러리 관장이 지훈에게 그녀의 행방을 의뢰했다. 그런데 이 장소…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는 서랍을 열어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빛바랜 그 사진 속에는 앳된 서연이, 정확히는 서연의 뒷모습이 같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대학 시절, 지훈과 서연이 처음으로 함께 떠났던 여행지였다. 서연은 그곳에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한참을 앉아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하는 서연은 늘 그랬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했던, 섬세하고 고요한 영혼. 한지우의 그림에서 서연의 화풍과 비슷한 감성을 느꼈던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을까?

“우연이… 이렇게 잔인할 리가 없잖아.”

지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이성적인 탐정의 눈은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10년 넘게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그리움은 이 모든 우연을 운명이라고 속삭였다. 사라진 첫사랑, 박서연.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였다. 그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야, 그녀의 흔적이 어쩌면 한지우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숨겨진 작업실

사진 속 장소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오래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산자락 깊숙이 숨어 있는 외딴 고택이었다. ‘바람 언덕 아래 작업실’이라는 팻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적막만이 흐르는 이곳에서 한지우는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서연은 정말 이곳에 왔었던 걸까?

지훈은 작업실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마당은 잡초가 무성했고, 창문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한지우가 이곳을 떠난 지 꽤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실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작은 텃밭 옆으로 난 샛길 끝에 허물어진 담벼락이 보였다. 그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집 주인분 좀 뵐 수 있을까요?”

지훈의 말에 아주머니는 호미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아주머니는 지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집은 한참 전에 비었어. 그림 그리는 아가씨가 살았었는데, 갑자기 이사를 갔지 뭐야. 혹시 그 아가씨 찾는 거야?”

“네, 제가 그분 의뢰를 받아… 혹시 언제쯤 나가셨는지 아시나요?”

“글쎄, 몇 달 전쯤일 거야. 그런데 그전에… 훨씬 오래전에 이 집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가씨가 또 있었지. 그때는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아오곤 했는데… 아유, 그 아가씨가 그리던 그림들이 참 예뻤는데 말이야.”

아주머니의 말에 지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는 ‘오래전’ 그리고 ‘젊은 연인들’이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마치 지훈의 존재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혹시 그 아가씨 이름이… 서연이었을까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머, 맞아요! 박서연 아가씨. 어쩜 그렇게 조용하고 예뻤는지. 그림도 참 잘 그렸지. 그런데 이 한지우 아가씨가 이사 왔을 때, 그때도 참 놀랐어. 그림 그리는 솜씨가 어쩜 그렇게 서연 아가씨랑 닮았는지 몰라. 마치 서연 아가씨가 못다 그린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것 같았어.”

아주머니의 말은 지훈의 심장을 꿰뚫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한지우는 서연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서연의 흔적을 쫓아 이곳으로 왔거나, 혹은 서연의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 아가씨가 여기 살았을 때… 혹시 뭔가 남기고 간 건 없나요? 그림이나… 물건 같은 거요.”

아주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딱히 기억나는 건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한지우 아가씨가 이사 오기 전에, 이 담벼락 밑에서 낡은 스케치북을 하나 주웠던 것 같아. 서연 아가씨가 두고 간 것인지, 한지우 아가씨가 가지고 있던 건지 헷갈려서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었지 뭐야. 혹시 그게 필요해요?”

마치 신의 계시처럼, 아주머니는 손수레 위에 놓인 빛바랜 스케치북 한 권을 지훈에게 내밀었다. 흙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받아 들었다. 10년 만에, 서연의 흔적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의 기록

스케치북의 표지에는 ‘S.Y.’라는 이니셜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서연이 확실했다. 지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펼쳤다. 첫 장은 비어 있었고, 다음 장에는 낡은 종이 한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그 안에는 메마른 작은 꽃잎 하나가 조심스럽게 눌려 있었다. 빛바랜 그 꽃잎에서 아련한 서연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다음 장. 지훈의 눈은 크게 뜨였다. 스케치북 가득히 그려진 것은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지훈의 모습이었다. 콧날을 스치던 바람, 부드러운 눈매, 장난기 어린 미소… 서연이 그를 그리던 그때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옅은 연필 자국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애정이 느껴졌다.

그는 스케치북을 든 손이 너무나 떨려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스케치북은 단순한 그림 모음이 아니었다. 서연의 마음, 그녀의 시선, 그리고 그녀가 지훈에게 남기고 싶었던 무언가의 기록이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다음 장을 넘겼다. 스케치들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해갔다. 서연의 화풍에서 시작하여, 점차 한지우의 그림에서 보았던 독특한 터치와 색채가 섞이기 시작했다. 마치 두 화가가 시간을 초월하여 한 스케치북 안에서 대화하고 있는 듯했다. 서연의 그림이 끝나고, 한지우의 그림이 시작되는 지점, 그 경계가 모호했다. 한지우가 서연의 흔적을 따라, 그녀의 예술적 영감을 이어받아 그림을 그렸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 그곳에는 완성되지 않은 그림과 함께, 작은 글씨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글씨를 읽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곳, 푸른 언덕 너머의 갤러리.’

그것은 한지우의 글씨였다.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지워진 듯한 서연의 글씨체가 겹쳐져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곳에서.’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푸른 언덕 너머의 갤러리’. 새로운 단서이자, 어쩌면 서연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일 수도 있는 문구. 그는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10년 만의 재회는, 이제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운명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명확했다. 푸른 언덕 너머의 갤러리. 그곳에서, 그는 드디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