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훈은 낡은 나무 책상에 기대어 앉아, 손에 든 빛바랜 사진을 응시했다. 사진 속에는 서연과 함께 보육원에서 찍은 아이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겨 있었다. 어제, 꼬마 서연의 옆에 서 있던 유독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아이, 박미영. 보육원 원장이 간신히 기억해낸 이름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지훈은 그것이 굳건한 밧줄이라도 되는 양 부여잡고 있었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자료 조사 끝에, 박미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몇 사람의 행적을 찾아냈다. 그 중 한 명은 현재 서울 근교의 작은 꽃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끌리는 직감이었다. 서연도 꽃을 좋아했다. 어릴 적 함께 꺾던 들꽃의 이름을 속삭이던 서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사무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훈은 늘 마시던 씁쓸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20년 전의 그 아이가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기다려주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
꽃집은 예상보다 작고 아담했다. 가게 앞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혹시라도 서연에 대한 불쾌한 소식이라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유리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성이 지훈을 보고 있었다. 사진 속 까무잡잡했던 얼굴의 특징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박미영. 그녀였다.
“박미영 씨 맞으신가요?”
지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미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실례지만, 저는 탐정 강지훈입니다. 혹시… 보육원에서 함께 지냈던 서연이라는 아이를 기억하시나요?”
서연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미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서연이요? 그 이름을 저에게 묻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말없이 서 있는 미영의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움, 슬픔, 그리고 조금의 경계심. 지훈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진 속 아이… 서연이와 미영 씨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미영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사진 속 어린 서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 아이를… 찾으시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서연이를 찾으세요?”
지훈은 자신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첫사랑이었고,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고. 미영은 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련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녀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그렁거렸다.
“서연이는 참 착하고, 밝은 아이였어요. 저에게는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 같은 존재였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미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보육원을 떠난다는 말도 없이, 편지 한 장 없이. 그 후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훈은 고통스럽게 말했다. “혹시, 서연이가 보육원을 떠나기 전에 어떤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나요? 누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특별한 곳으로 간다거나…”
미영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시선은 먼 허공을 응시했다. “분명… 떠나기 며칠 전이었을 거예요. 서연이가 밤중에 울면서 저에게 왔어요. 어떤 아저씨가 자기를 데리러 온다고, 무섭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그냥 보호자가 온다는 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서연이는 그 사람을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평소에 없던 일이었어요.”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려워했다?’ 평온한 입양 절차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아저씨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인상착의라든지…”
미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서연이가 그 아저씨가 준 것이라며 작은 조약돌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건 기억해요. 아주 반짝이는, 특이한 모양의 조약돌이었어요.”
조약돌. 지훈의 기억 속 한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어린 서연이 늘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반짝이는 돌멩이. 그것이 그 남자에게서 온 것이었다니. 그는 서연에게 무엇을 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 무엇을 빼앗으려 했던 것일까.
미영은 다시 깊은 한숨을 쉬더니, 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솔직히… 서연이가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저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고, 저 또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작년에, 아주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도 보육원 출신이었는데, 서연이의 소식을 알고 있더군요.”
지훈은 숨을 멈췄다. “누구였습니까? 서연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나요?”
“그 사람은 서연이가 지금 ‘혜림 보육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어요.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고…” 미영의 눈빛이 다시 슬픔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어요. 그 친구는 서연이가 더 이상 ‘서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연락처도 쉽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숨기려는 것 같다고요.”
‘혜림 보육원’. 지훈은 이 세 글자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고 숨기려 한다’는 말에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사랑 서연은 왜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하는 걸까.
미영은 계산대 아래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이건… 그 친구가 알려준 서연이의 마지막 주소예요.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요.”
낡은 수첩에 적힌 주소는 서울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희미한 글씨로 또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은서’.
“김은서…?” 지훈은 낮게 중얼거렸다. 박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친구가 서연이가 지금 김은서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을 거라고 했어요. 자원봉사를 하는 혜림 보육원은 그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다고 들었어요.”
지훈은 수첩을 받아들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동안의 노력이 또 다른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지금껏 서연을 찾으며 얻은 가장 명확한 단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첫사랑 서연이 살아있고, 어쩌면 손이 닿을 곳에 있다는 생생한 실감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이유. 그 슬픈 이야기가 이제 막 베일을 벗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지훈은 미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꽃집을 나섰다. 쨍한 햇살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이제 그는 ‘김은서’라는 이름의 여인을 찾아야 했다. 잃어버린 서연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한번 길을 나설 준비를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