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세계의 숨결**
어둠은 익숙한 벗이었다. 잿빛 빌딩 숲, 폐허가 된 도시의 골목을 따라 이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늘 희미한 먼지와 붉은 녹이 뒤섞인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머리 위로는 찢겨나간 하늘 조각들이 간간이 섬광을 뿌려댔고, 그 아래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바람에 쓸려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체력: 28%]
[기력: 15%]
[배고픔: 임계치]
HUD에 깜빡이는 경고창들은 이한의 신경을 긁어댔다. 며칠째 식량은커녕 제대로 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목은 바짝 타들어 갔고, 위장에서는 쓰린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대로라면 ‘사망’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게임 오버를 맞을 판이었다. 죽으면 모든 것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다시 헐벗은 채 맨몸으로 시작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젠장… 하다못해 썩은 물이라도….”
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너진 상점가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창문은 깨지고, 진열대는 부서진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때 번성했을 그 어떤 흔적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잿더미와 폐허만이 남아있을 뿐.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녹슨 철봉 하나. 허리춤에는 다 쓴 총집만이 덜렁거렸다. 총알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생존에 대한 지독한 의지와 잔뼈 굵은 경험뿐이었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리는 기계음. 위험 신호였다. 이 폐허에는 늘 그런 그림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띠었지만,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들. 혹은 섬뜩한 발톱을 가진 변종들.
이한은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희미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시큼하고 역겨운, 피와 철의 비린내.
“빌어먹을, 또 저놈들인가.”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그는 부서진 벽 틈으로 시야를 확보했다. 스산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덩치. 날카로운 금속 집게 팔. 그리고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단안. ‘수집기’. 낡고 부서진 건물 잔해를 긁어모으는 것이 주 임무인, 한때는 인류의 편이었을 기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집기 – 레벨 32]
[경고: 공격적 성향. 주의 요망.]
수집기는 이한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살기등등한 기계음과 함께 느릿하게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놈은 단순한 탐색 기계가 아니었다. 놈의 몸체 곳곳에 박힌 날카로운 부품과 닳아 빠진 철판에는 수많은 생명체의 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놈은 ‘생존자’도 함께 수집하는 기계였다.
이한은 망설였다. 저 거대한 놈을 상대하기엔 지금 그의 상태가 너무나도 취약했다. 하지만 놈이 어슬렁거리는 곳, 저 폐허의 한복판에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있었다. 몇 시간 전 우연히 입수한 좌표. 오래된 군용 보급창의 위치. 그곳엔 분명 식량과 물, 그리고 어쩌면… 총알까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퀘스트: 군용 보급창 확보]
[목표: 보급창 내부의 물품 획득]
[보상: 미지수]
[시간 제한: 24시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24시간 안에 놈을 피하든, 놈을 쓰러뜨리든 해야 했다. 이한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좋아… 정면 돌파는 무리.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는 다시 몸을 벽에 붙이고, 수집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놈은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몸체를 이끌고 폐허를 훑는 움직임이 둔중했지만, 그 거대함에서 오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저 덩치에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지금의 체력으로는 한 방에 즉사할 것이 뻔했다.
이한은 숨을 멈추고 고도로 집중했다. 폐허 구석에 쌓인 무너진 잔해들, 기울어진 전봇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버려진 차량. 이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길이자 동시에 함정으로 보였다.
문득, 수집기가 멈춰 섰다. 붉은 단안이 한 곳을 응시했다. 이한이 숨어있는 방향과는 다른 쪽이었다. 놈의 기계팔이 부서진 벽을 쾅! 하고 내리쳤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쾅! 쾅!
수집기는 집요하게 폐허의 특정 지점을 파헤쳤다. 아마도 희귀한 잔해, 혹은 생존자의 시체라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놈의 움직임이 잠시 한 곳에 묶인 틈을 타, 이한은 재빨리 다음 엄폐물로 몸을 날렸다. 쿵, 하는 발소리는 최대한 죽였지만, 심장이 발악하듯 쿵쾅거렸다.
겨우 낡은 트럭 잔해 뒤로 숨은 이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놈의 붉은 단안이 잠시 자신의 방향으로 스치는 듯했지만, 다시 잔해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행이었다. 놈의 시야는 생각보다 넓었지만, 움직임만큼 정밀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놈은 생명체보다는 ‘자원’에 더 집중하는지도 몰랐다.
“망할…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한은 손에 든 녹슨 철봉을 고쳐 쥐었다. 이 무기 하나로 저 거대한 놈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한의 목표는 놈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는 폐허의 지형을 머릿속에 그렸다. 군용 보급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수집기 바로 옆을 통과하는 골목길이었다. 문제는 그 골목길 중간에 부서진 버스 한 대가 길을 막고 있다는 점이었다. 버스 위로 올라가면 시야에 노출될 것이고, 버스 밑을 통과하려 해도 놈의 길고 날카로운 집게 팔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저거라면….”
이한의 눈이 반짝였다. 놈이 파헤치던 잔해 더미 옆에 위태롭게 서 있는, 철골이 드러난 콘크리트 기둥 하나. 놈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저 기둥은 분명 무너질 것이다. 이한은 한 가지 묘수를 떠올렸다.
그는 다시 몸을 웅크리고, 수집기가 집중하는 반대편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폐허를 감싸는 으스스한 정적 속에서 그의 발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렸다. 삐걱거리는 철골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간판 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은폐해 주었다.
마침내, 그는 수집기의 후방 가까이 도달했다. 놈은 여전히 끈질기게 잔해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이한은 허리춤에서 섬광탄 하나를 꺼냈다. 보급창에서 겨우 얻은 귀한 아이템이었다. 이것까지 써야 한다니 아까웠지만, 생존이 먼저였다.
[아이템: 섬광탄 (1개)]
이한은 섬광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나… 둘… 셋….”
그는 섬광탄을 놈이 파헤치던 철골 기둥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정확히 던졌다.
챙강!
섬광탄이 철골에 부딪히며 작은 불꽃을 튀겼다. 수집기의 붉은 단안이 느릿하게 섬광탄이 떨어진 곳을 향했다. 놈의 기계음이 경고하듯 높아졌다.
콰아앙!
강렬한 빛과 함께 섬광탄이 터졌다. 놈의 붉은 단안이 순간 하얗게 번뜩이며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듯했다. 동시에 이한은 전력을 다해 철봉을 휘둘러 기둥의 약한 부분을 가격했다.
쩌저적!
이미 수집기의 힘으로 약해져 있던 기둥은 이한의 마지막 일격에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콰아아앙!
무너진 기둥은 수집기와 보급창을 가로막는 부서진 버스 사이를 정확히 가로막았다.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었고, 수집기는 혼란스러운 기계음을 내며 뒤로 물러섰다. 놈의 붉은 단안은 여전히 번뜩이며 주위를 탐색하고 있었지만, 일시적인 시야 장애와 함께 기둥이 무너지며 발생한 충격으로 놈의 시스템이 잠시 마비된 듯 보였다.
“지금이다!”
이한은 주저할 틈도 없이 무너진 기둥 사이의 좁은 틈새로 몸을 던졌다. 쿵! 쿵! 쿵! 폐허를 가로막았던 장애물이 무너지자, 그에게 길이 열렸다. 기둥이 만들어낸 임시 방어벽 덕분에 수집기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달렸다. 허벅지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폐는 터질 듯 아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멈췄다간 놈의 예리한 집게 팔이 등 뒤에서 날아들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이한의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녹슬고 낡았지만, 여전히 굳건히 닫혀 있는 군용 보급창의 문이었다. 문 위에는 낡은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제17 보급창 – 접근 금지].
[목표 지점 도달: 군용 보급창]
[퀘스트 진행도: 50%]
이한은 철문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드디어… 드디어 이곳에 도달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고도로 암호화된 전자 잠금장치. 게다가 문 위에는 낡았지만 여전히 기능을 하는 센서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젠장, 또 다른 문제인가….”
이한은 손에 든 철봉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낡은 해킹 장비를 꺼냈다. 이 장비로는 고작 저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데에만도 몇 분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수집기는 이미 회복되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굉음. 수집기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이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그는 해킹 장비를 철문 옆의 단말기에 연결했다.
삐빅! 삐비비빅!
장비에서 미약한 불빛이 깜빡였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그의 귀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의 눈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과연, 이 문 안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혹은,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