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고요한 아파트. 거실 벽걸이 시계의 짧은 바늘이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긴 바늘은 벌써 세 바퀴째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한밤중의 적막은 깊어지고, 멀리 도시의 잔잔한 소음마저 침묵에 잠식당하는 시간이었다. 열여덟 살 지아는 책상에 앉아 널브러진 문제집 위로 펜을 굴렸다. 창밖은 검은 도화지처럼 칠흑 같았고, 유리창에 반사된 지아의 피곤한 얼굴은 미미하게 흔들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 더욱 창백해 보였다.
“언니, 아직도 안 자?”
문틈으로 빼꼼히 내민 작은 얼굴은 동생 수아였다. 열 살, 한창 호기심 많고 겁도 많은 나이. 지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응, 좀 더 하고. 수아는 자야지.”
“무서워. 옆집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 나.”
수아의 말에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옆집은 지난달부터 비어있었다. 이사 간다고 떠들썩하더니, 며칠 뒤 깨끗하게 정리된 빈집으로 남았다고 엄마가 이야기했었다.
“무슨 소리? 바람 소리겠지.”
“아니야. 뭔가 긁는 소리… ‘흐윽, 흐윽’ 하는 소리도 들렸어.”
수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아는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아의 작은 침대 옆에 앉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괜찮아, 언니가 옆에 있을게. 어서 자.”
수아는 작은 손으로 지아의 팔을 꽉 잡았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앉아 수아의 토닥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 수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고, 작은 입술 사이로 잠꼬대인지 웅얼거림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옆집에서 소리가 난다고?’
지아는 조용히 수아의 방을 나왔다. 복도는 아까보다 훨씬 차갑게 느껴졌다. 분명 에어컨을 끄고 잤는데. 살을 에는 듯한 한기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거실 창문을 닫았나 확인하려던 찰나,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심장이 발바닥까지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지아는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모든 식기구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잤는데. 도둑인가? 지아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거실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주황빛이 어둠을 밀어냈지만, 이상하게도 어둠은 더욱 짙어진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룻바닥이 ‘삐그덕’ 하고 불길한 소리를 냈다. 주방은 생각보다 말끔했다. 깨진 유리 조각도, 흩어진 식기들도 보이지 않았다. 지아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을 느꼈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그 순간, 머리 위 식탁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완전히 꺼졌다. 짙은 어둠이 지아를 삼키려는 듯 달려들었다.
“뭐… 뭐야?”
지아는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더듬었다. 찰칵, 찰칵.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손끝에 닿는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누군가 바로 옆에서 얼음 주머니를 흔드는 것 같았다.
‘쏴아아아—’
냉장고 안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지아는 얼어붙은 몸으로 냉장고 문을 천천히 열었다. 냉장고 안은 온통 비어 있었다. 텅 빈 선반들, 텅 빈 음료수 칸. 그리고 그 차가운 빈 공간에서 다시 한번, ‘흐윽, 흐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훨씬 가깝고, 훨씬 또렷했다. 흡사 어린아이가 흐느끼는 듯한, 혹은 늙은이가 겨우 숨을 들이쉬는 듯한 기이한 소리.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지아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주방에서 벗어나야 했다. 수아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달려가야 했다.
뒤돌아 서려는 순간, 식탁 위 과일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과 한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빨간 사과는 느릿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지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믿을 수 없었다. 이건 꿈이다. 피곤해서 생긴 환각일 뿐이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온몸의 털들이 쭈뼛 서고, 심장이 널뛰듯 격렬하게 뛰었다.
“누구…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가 겨우 비집고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지아는 재빨리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의 커다란 장식장이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무언가 검고 흐릿한 형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형체는 서서히 커졌다. 그 속에서 인간의 형상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나 왜곡되고 뒤틀린 모습이라, 감히 눈으로 똑바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크으으으……”
괴이한 신음소리가 온몸의 솜털을 곤두서게 했다. 그것은 점차 지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 공간을 압도하는 듯한 위압감을 풍기면서.
“안 돼… 안 돼!”
지아는 뒷걸음질 쳤다. 수아의 방 쪽으로 향하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지아는 있는 힘껏 뛰었다. 하지만 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니, 닫혀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안쪽에서 잠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수아! 수아!”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에서 차가운 기운이 새어 나와 지아의 손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시선.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형체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형상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지아를 꿰뚫어 보는 듯 섬뜩하게 빛났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아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 그리고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뒤섞여 마치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손바닥 안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나는 것을 지아는 느꼈다. 따뜻하고, 강력하며, 이 모든 공포를 잠재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힘이었다.
검은 형체가 손을 뻗어 지아의 목을 조르려는 듯 다가왔다.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아!”
지아의 눈동자가 강렬한 빛으로 물들었다. 빛나는 손을 뻗자, 그 속에서 피어오른 에너지가 거대한 검은 형체를 향해 쏘아졌다.
콰앙! 귓청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아파트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완전한 암흑 속에, 지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만이 거대한 그림자와 맞서고 있었다.
이 밤은, 이제 막 시작된 전투의 서막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