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창백한 달이 핏빛 그림자를 흩뿌리는 밤이었다. 수백 년 전, 영웅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꿰뚫고 마신을 봉인했던 고결한 성벽, ‘엘레니움’이 차갑게 침묵하고 있었다. 한때는 정의와 수호의 상징이었던 그곳은 이제 불길한 기운을 토해내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에 불과했다.

카엘은 성벽 아래, 어둠이 가장 깊게 깔린 숲 그림자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휘감긴 검은 망토는 밤의 장막과 한 몸이 되어 숨결마저 삼키는 듯했다. 잿빛 눈동자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리안….”

메마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이름은 쓰디쓴 독이었다. 친구. 동료. 형제나 다름없던 존재. 한때는 서로의 등을 맡기고, 함께 창을 겨누며 세상의 불의에 맞섰던 이. 하지만 그 ‘한때’는 카엘이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냈다.

*정의? 명예? 웃기지도 않는군.*

뇌리에서 떠오른 과거의 파편은 그저 끔찍한 조롱으로 다가왔다. 리안은 카엘을 배신했다. 모든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대륙 최고의 기사, 카엘에게 ‘금지된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그 거짓말은 너무나도 그럴싸해서, 아무도 카엘의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카엘은 지하 깊은 곳의 ‘잊혀진 심연’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곳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희망이 사라지는 지옥이었다.

**크르르릉…!**

카엘의 주변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잊혀진 심연에서 카엘은 죽지 않았다. 죽을 수도 없었다. 그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쳤고, 결국 스스로 어둠을 집어삼키는 법을 터득했다. 버림받은 모든 것을 자신 안에 품었다. 그 대가로, 카엘은 더 이상 예전의 ‘빛의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망자들의 그림자를 부르고, 절규하는 영혼들의 힘을 빌려 고대의 저주를 읊조리는 존재였다. 그를 ‘그림자 군주’라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어리석은 놈… 엘레니움의 기사단이 여전히 정의를 수호하고 있다고 믿는가?”

성벽 위, 망루에서 횃불을 든 순찰병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카엘은 그림자 속으로 더욱 깊이 녹아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 같았고, 발소리는 죽음의 속삭임처럼 희미했다. 훈련된 기사들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완벽한 침투였다.

엘레니움의 정문은 여전히 견고한 마법 방벽과 수십 명의 기사들로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엘의 목표는 정문이 아니었다. 그는 북쪽 성벽의 가장 오래된 석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손가락이 거친 돌 표면을 파고들자, 거대한 석벽이 마치 썩은 나무처럼 부스러졌다.

**촤아아악!**

무언가 짓눌리는 소리와 함께, 카엘은 성벽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의 뒤로 어둠이 흔적을 지우며 부서진 석벽을 다시 메웠다. 완벽한 은신이었다.

안뜰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복도를 지나는 기사들의 발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카엘은 그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며 중앙 탑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은 대대로 기사단장의 집무실이었다. 이제는 리안의 거처가 되었을 터.

복도를 지나던 두 명의 기사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경악했다.

“누… 누구냐?!”

**쉬이이이이익— 퍽!**

한 명의 기사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카엘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푸른빛 섬광이 번쩍이더니, 기사의 목에서 붉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다른 기사는 혼비백산하여 검을 뽑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카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어둠의 기운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크아아악!**

기사는 온몸이 조여드는 고통에 절규했지만, 곧 비명은 끊어졌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시들어가며 먼지로 변해갔다. 카엘은 굳게 닫힌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따랐을 뿐이겠지. 하지만 그 대가는… 똑같다.”

냉정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어둠의 힘은 그의 마음마저 차갑게 물들였다. 예전의 카엘이라면 죄 없는 이들을 해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죄 없는’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중앙 탑의 문이 카엘의 눈앞에 나타났다. 육중한 나무 문은 강철 빗장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부술 수 없는 마법적인 봉인이 걸려 있었지만, 카엘에게는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그는 검은 손가락으로 문에 새겨진 마법 문양을 쓰다듬었다. 어둠의 기운이 문양을 타고 스며들자, 강철 빗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지지직**거렸다. 이내 육중한 문이 **끼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먼지가 자욱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엘은 한 걸음 한 걸음,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 끝, 가장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방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쿵. 쿵. 쿵.**

카엘의 심장이 다시금 차갑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코앞이었다.

문 안에서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면서도 혐오스러운 그 목소리.

“걱정 마라. 카엘은 영원히 심연에서 썩어갈 것이다. 그가 돌아올 일은 없어.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어.”

리안이었다. 그는 지금, 카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카엘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눈동자에 끓어오르는 핏빛이 번졌다.

**쾅—!**

카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을 걷어찼다. 문은 경첩에서 떨어져 나가며 거친 소리를 냈고, 안쪽의 대화는 일순간 정지했다.

방 안에는 거대한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뒤에 리안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고위 기사가 경계 태세로 서 있었다. 리안은 카엘의 등장에 들고 있던 펜을 놓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카… 카엘? 설마… 살아있었단 말이냐? 말도 안 돼! 심연에서…!”

리안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카엘은 한때 친구였던 그의 얼굴을 차갑게 응시했다. 변함없이 위선적인 가면을 쓴 듯한 얼굴.

“그래, 살아 돌아왔다. 리안.”

카엘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저음처럼 묵직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널 데리러 왔다.”

방 안을 휘감은 어둠의 기운이 리안과 그의 병사들을 서서히 옥죄기 시작했다. 고위 기사들은 뒤늦게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들의 손은 이미 어둠의 손아귀에 잡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리안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아… 안 돼! 이것은… 금지된 마법! 너는 어둠에… 어둠에 물들었어!”

카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 때문이지.”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방 안에 있던 모든 빛이 산산조각 났다. 리안과 병사들의 비명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엘레니움의 심장을 향한, 처절한 복수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