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창밖은 짙은 먹빛을 띠고 있었다. 거센 비는 밤새도록 그칠 줄 모르고 유리창을 두드렸다. 서연은 잠 못 이루고 침대에 기대앉아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웅장한 천둥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질 때마다, 그녀의 가슴속에도 똑같은 불안의 메아리가 파고들었다. 밤기차에서 준호를 만난 이후로, 그녀의 삶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 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틀 전, 그녀는 준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했다. 그와의 미래를 꿈꿀수록, 그녀의 어둡고 복잡한 과거는 더욱 선명하게 그녀를 옥죄어 왔다. 숨겨진 가족의 그림자, 끝나지 않은 채무의 굴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준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녀는 용기를 냈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준호의 따스한 눈빛을 외면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 괜찮은 척 웃었다. 그 웃음 뒤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늪이 숨어있었다.
서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차가운 마룻바닥을 밟고 창가로 다가섰다. 빗물에 젖어 흐릿한 창밖 풍경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작은 펜던트를 만졌다. 준호가 밤기차에서 처음 건네주었던, 행운을 빌어주는 작은 상징. 그때의 그는, 그녀의 삶에 갑작스레 찾아온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고요했던 밤의 적막을 깨고 들어온 그의 온기는, 메마른 그녀의 세상에 따뜻한 비를 뿌려주는 듯했다.
“서연아, 아직 안 자고 있어?”
문 밖에서 들려오는 준호의 목소리에 서연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역력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차림으로, 그는 밤새 그녀를 기다렸던 듯했다.
“괜찮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서연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준호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창밖을 함께 응시했다. “비가 참 많이 오네. 무슨 일 있어? 요 며칠 계속 표정이 안 좋았어.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그의 다정한 질문에 서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에게 모든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말을 돌렸다. “아니, 그냥… 요즘 조금 피곤해서 그래. 잠시 쉬고 싶어.”
준호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쉬고 싶으면 쉬어도 돼. 나한테 모든 걸 다 털어놓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 하지 마. 나는 서연이 네 옆에 항상 있을 거야.”
그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어떻게 그의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을까.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 뻔한데. 그녀의 가족이 얽힌 그 끔찍한 채무 관계는, 단순히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후가 되어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서연은 잠시 바람을 쐴 겸 집 밖으로 나왔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준호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에게서 잠시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카페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복잡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에는 낯익지만 동시에 소름 돋는 이름이 떠 있었다. 그녀의 숨이 턱 막혔다. 받지 않으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전화를 받았다. 차가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서연아,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었니? 우리가 약속했던 그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것은 그녀를 옥죄는 가족의 빚과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가 준호와 함께하는 행복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의 그림자는 언제나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하려 했다.
“알고 있어요. 약속은 지킬 거예요.”
“지켜야지. 네가 약속을 어긴다면, 너만 힘들어지는 게 아닐 텐데. 네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여파가 미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상대방의 말은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준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을 이용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수화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준호를 보호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이 어두운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야 했다.
전화를 끊고, 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준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함께 이겨낼 것인가, 아니면 그를 위해 그를 떠나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질 것인가. 전자는 너무나 이기적인 선택 같았고, 후자는 그녀의 심장을 찢는 고통을 동반할 것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펜던트를 다시 만졌다. 밤기차에서 시작된 인연.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예정된 운명이었을까. 그때의 순수했던 감정들이 지금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결심한 듯이 밖으로 향했다.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서연은 준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굳건한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집 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그녀를 기다리던 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녀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걱정을 담고 있었다. 그 순간, 서연의 발걸음은 멈춰 섰다. 그녀는 과연 그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을까? 아니, 그래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