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여름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돌담을 타고 오르는 칡넝쿨이 햇빛을 가린 탓에, 할아버지 댁 뒤편 숲으로 난 오솔길은 한낮인데도 어둑했다. 오래된 돌마루 방앗간의 삐걱이는 나무 문을 겨우 열고 들어서자, 퀘퀘한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야, 진짜 여기야? 뭔가 나올 것 같잖아!”
사촌 현준이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에 든 스마트폰 불빛이 겨우 앞을 비출 뿐이었다. 현준이 옆에 선 소라는 무서워하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며 바닥을 살폈다. 얼마 전 발견한 낡은 일기장에 쓰여 있던 ‘방앗간 뒤편, 빛바랜 돌 아래 숨겨진 길’이라는 구절이 오늘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여기, 이 돌!”
소라가 외쳤다. 우리는 현준이의 폰 불빛을 받아 소라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앗간 안쪽 벽면에 삐죽 튀어나온, 다른 돌들보다 유난히 낡고 색이 바랜 돌이 보였다. 현준이와 내가 동시에 돌을 밀어보았다. 묵직했지만, 분명히 움직이는 감촉이 있었다. 세 명이 온 힘을 다해 돌을 밀자, ‘끄으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내 돌이 있던 자리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고 시커먼 틈이 드러났다. 찬 바람이 틈새에서 새어 나왔다. 현준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틈을 들여다보았다.
“와… 진짜 길이 있네.”
“들어가 볼래?”
소라의 눈은 이미 그 너머의 세계를 탐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어둠 속 미지의 공간은 늘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현준이가 이미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보자! 대신 조심해서.”
어둠 속으로의 발걸음
현준이가 먼저 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이어서 소라, 그리고 내가 들어갔다. 돌마루 방앗간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자, 우리는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다. 현준이의 스마트폰 불빛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흙냄새, 습한 곰팡이 냄새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천장은 낮았고, 벽은 축축한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허리를 굽힌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여기가… 대체 언제 만들어진 길일까?”
소라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현준이는 대답 없이 앞만 비추고 있었다. 나도 긴장된 상태로 주위를 살폈다. 간혹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우리는 자꾸 움찔거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미로처럼 굽이굽이 이어지던 통로가 끝나는 듯했다.
“어? 뭔가 넓어지는 것 같아!”
현준이의 불빛이 통로의 끝을 비추자, 우리는 숨을 헙 들이켰다. 통로는 작은 동굴처럼 넓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방이 흙과 돌로 이루어진 원형의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돌 테이블과 낡은 나무 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방의 공기는 통로와 달리 의외로 건조했고, 묘한 정적이 흘렀다.
잊힌 방의 비밀
우리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현준이의 스마트폰 불빛이 방의 구석구석을 비추자, 벽에 그려진 희미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형상과 알 수 없는 기호들, 그리고 뭔가 사냥하는 듯한 모습의 벽화였다. 꽤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여기가… 누가 살던 곳인가?”
소라가 벽화를 신기한 듯 손으로 쓸어보았다. 나는 돌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는 흙먼지가 두껍게 쌓인 항아리와 정체불명의 돌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현준이는 나무 상자 중 하나를 발로 툭 건드렸다. 상자는 낡았지만 꽤 튼튼해 보였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얇고 낡은 천에 싸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현준이가 조심스럽게 천을 걷어내자, 빛바랜 가죽으로 만든 듯한 책 한 권이 나타났다. 표지는 해져 있었고, 앞면에 이상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기대와 놀라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앗간에서 이어진 통로 입구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 서로를 끌어안았다.
“뭐야? 무슨 소리야?”
현준이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통로 입구 쪽에서 흙덩이가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설마, 우리가 갇힌 건가?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쩌면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소라가 재빨리 현준이의 폰을 받아들고 통로 입구를 비추었다. 다행히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까보다 훨씬 더 불안정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빨리 나가야 했다. 나는 현준이에게 서둘러 책을 챙기라고 속삭였다. 우리는 서둘러 책을 챙겨 품에 안고 다시 좁은 통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빨리, 빨리 나가자!”
현준이가 소리쳤다. 우리는 다시 허리를 굽혀 통로를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통로가 무너지는 듯한 불안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방앗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빛을 향해 기어갔다.
마침내 방앗간 안으로 기어나왔을 때, 우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은 흙투성이였지만, 무사히 탈출했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밖은 여전히 한여름의 햇볕이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현준이는 바닥에 드러누웠고, 소라는 흙먼지를 털어내며 품에 안은 책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책을 바라보았다. 낡은 가죽 책. 이 책이 우리에게 또 어떤 비밀을 알려줄까?
우리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 통로 너머의 비밀스러운 방, 그리고 그 안에서 찾은 이 오래된 책. 할아버지 댁 여름 방학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가득 차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