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햇살이 바다 위에 부서졌다. 그마저도 두꺼운 해무에 가려 지상까지 제대로 닿지 못하고 허공에 희미한 잔상만을 남길 뿐이었다. 어둠바다 마을, 그 이름처럼 언제나 어스름에 잠겨 있는 듯한 이 외딴 해안가 마을은 성천 제국의 가장 깊은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끊임없이 살을 에는 바람과 짭짤한 바다 냄새, 그리고 썩어가는 해초와 비린 생선의 악취가 뒤섞여 희망 없는 삶의 모든 순간을 지독하게 감쌌다.
류진은 낡은 그물 한 자락을 어깨에 메고 축축한 모래사장을 걸었다. 발밑에서 진득하게 느껴지는 진흙과 갯벌의 감촉은 이제 그의 일상이었다. 열여덟 해를 어둠바다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그는 언제나 이 냄새와 촉감을 동반한 고통을 겪었다. 제국은 드넓은 영토를 자랑했지만, 그 광대한 지배력은 마을 사람들에게 혹독한 세금과 강제 노역이라는 형태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은 제국의 것이었다. 물고기 한 마리, 조개 하나까지도 제국의 허락 없이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류진아, 오늘 고기는 좀 건졌냐?”
작은 배 위에서 낡은 통발을 정리하던 노인, ‘찬’이 목이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은 평생을 바닷바람에 시달린 탓에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했다.
“오늘은 좀 시원찮습니다, 어르신. 새벽부터 그물을 던졌는데, 건진 게 별로 없어요.”
류진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피로가 배어 있었다. 새벽부터 걷어 올린 그물에는 뼈대만 앙상한 몇 마리의 물고기뿐, 제국의 탐관오리들이 만족할 만한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해안선과 연결된 유일한 좁은 길에서 먼지가 흙먼지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제국의 ‘천공 병사’ 두 명이 거만한 기세로 말을 몰고 나타났다. 그들의 갑옷은 햇살을 받아 번쩍였고, 창 끝은 날카롭게 하늘을 찔렀다. 뒤이어 따라오는 수레에는 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는 탐관오리, ‘헤루만 백작’의 휘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마을 전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부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고, 아이들은 부모의 치맛자락 뒤로 숨었다. 헤루만 백작은 기름지고 뚱뚱한 몸을 수레에서 내리며, 콧등에 걸린 작은 안경을 치켜세웠다. 그의 작은 눈이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는 순간, 마치 그들이 거름더미라도 되는 양 경멸이 역력했다.
“흐음, 어둠바다 마을이라. 이름만큼이나 칙칙한 곳이군. 다들 모여라! 오늘부로 ‘심해의 보석세’가 두 배로 인상되었음을 통보하러 왔다!”
헤루만 백작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려 퍼졌다. 심해의 보석세. 그것은 이 마을에서 나는 유일한 특산물, 즉 심해 진주에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세금 탓에 진주 채취는 목숨을 건 고된 노동이 되었다. 심해는 말 그대로 어둠과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곳에서 진주를 캐내다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백작님! 이미 지난달에도 세금을… 이번 달에는 채취량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찬 노인이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은 이미 굽어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일말의 호소가 담겨 있었다.
“닥쳐라, 늙은이! 제국의 명이 곧 법이다. 변변치 못하다? 너희의 게으름을 탓할지언정, 어찌 제국을 탓한단 말이냐? 당장 다음 해가 뜨기 전까지 인상된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면, 너희 모두는 제국의 ‘황무지 노역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헤루만 백작은 콧방귀를 뀌며 찬 노인을 밀쳤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모래바닥에 주저앉았다. 천공 병사들은 이 모든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류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황무지 노역장. 그것은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나을 정도로 지독하고 가혹한 곳이었다. 그의 눈은 주저앉은 찬 노인의 마른 어깨와, 그 뒤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아이들을 향했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 부패한 제국은 언제까지 우리를 짓밟을 셈인가.
“백작님, 저희는 정말로…”
류진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 서 있던 한 동료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류진아, 참아라.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체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류진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문득 어제 자신이 심해에서 건져 올린 것이 담긴 낡은 주머니로 향했다. 그는 진주가 아닌 다른 것을 찾았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칠흑처럼 검고 매끄러운 조약돌이었다. 일반적인 돌과는 다른 기이한 감촉과, 빛을 흡수하는 듯한 묘한 질감은 보는 이를 등골 오싹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그 돌을 만지고 난 후부터는 밤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는 심연에 갇혀,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의 어렴풋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 존재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정형의 형태였으며, 무한한 지식과 무한한 공포를 동시에 품고 있는 듯했다.
류진은 주머니 속의 조약돌을 꽉 쥐었다. 그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마치 돌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 돌을 가져와라.”
갑자기 헤루만 백작이 류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류진은 깜짝 놀라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백작의 날카로운 눈이 자신의 손에 들린 조약돌 주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제 진주 채취 과정에서 너희가 건져 올린 기이한 돌 말이다. 저녁에 몇몇 어부들이 그 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흉측하고 쓸모없는 돌일지라도, 제국에 보고되지 않은 물품은 모두 압수 대상이다.”
백작은 천공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두 명의 병사가 류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류진은 뒷걸음질 쳤다. 이 돌은 그저 돌이 아니었다. 밤마다 그를 찾아오는 악몽의 근원이자,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을 품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돌을 제국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건… 이건 그냥 돌입니다!” 류진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흥, 그저 돌이라? 그렇다면 내놓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천공 병사 중 한 명이 거친 손으로 류진의 멱살을 잡았다. 류진은 저항했지만, 병사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주머니에 있던 검은 조약돌이 데구르르 굴러나와 모래 위에 멈춰 섰다.
헤루만 백작이 조약돌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조약돌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백작의 눈동자에 섬광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류진은 놓치지 않았다. 백작의 얼굴에 희미한 놀라움과 함께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것은… 평범한 돌이 아니로군. 흐음, 제국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광물인가? 아니면… 보물인가?”
백작은 조약돌을 손에 쥐고 요리조리 살폈다. 조약돌의 표면에는 미세하지만 불규칙적인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신경망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우주의 별자리를 축소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류진은 그 문양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바다의 심연, 끝없이 펼쳐진 암흑, 그리고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아득한 존재의 기척.
“이 돌은 제국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 마을은 이 귀한 물건을 숨기려 했으니, 응당 더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지.”
헤루만 백작은 조약돌을 품속에 넣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그 어떤 말보다도 차갑고 잔인했다. “당장 진주 세금을 두 배 더 늘려라! 그리고 이 돌에 대해 발설하는 자는 즉시 처형이다!”
마을 사람들은 절망에 잠겼다. 세금이 두 배 더 늘어났다니! 그것은 죽음과 다름없었다. 류진은 바닥에 엎드려 떨고 있는 찬 노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선, 눈물을 흘리며 공포에 질린 아내와 아이들을 보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류진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침내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타오르는 불길 같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 제국은 우리를 괴롭히는 괴물이다. 하지만 어둠바다 밑에는 제국보다 더 오래되고, 더 거대한 괴물이 잠들어 있다고 어른들은 속삭였다. 어쩌면, 그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국에 짓밟혀 죽어가느니, 차라리 미지의 존재에게 손을 내밀지언정.
류진은 저 멀리, 검푸른 심연으로 출렁이는 바다를 응시했다. 해무는 더욱 짙어져, 마치 바다 저 너머의 모든 것을 가리는 거대한 장막 같았다. 그 장막 뒤편에서, 인류의 이해를 벗어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죽지 않을 겁니다.”
류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에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헤루만 백작은 이미 등을 돌려 수레에 오르고 있었기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류진의 주위에 서 있던 몇몇 젊은 어부들은 그 말을 들었다. 그들의 눈빛에도 류진과 비슷한, 어두운 결의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깊은 바다는 항상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오늘 밤, 어둠바다 마을의 절망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한 갈망이, 미약하게나마 꿈틀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