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 보이지 않는 동거인

김민지, 서른두 살. 내 인생의 주어는 늘 ‘나’였다. 고요한 내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고, 내가 결정했으며, 내가 누렸다. 특히 이 작지만 아늑한 원룸 오피스텔은 그 ‘나’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공간이었다. 새하얀 벽지, 깔끔하게 정리된 소품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밤은 고단한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완벽한 안식처였다. 완벽, 그 자체였다. 적어도,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익숙한 나무 향기와 은은한 조명, 이 모든 것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듯했다. 일단 소파에 몸을 던지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하루 종일 시달린 회의와 보고서는 뇌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아, 맥주 한 캔만 있으면 완벽한데.”

냉장고로 향했다.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응?”

분명 어제 퇴근길에 마트에서 여섯 캔짜리 묶음을 사 왔을 텐데. 내가 즐겨 마시는 라거 맥주였다. 혹시 내가 너무 피곤해서 착각했나? 다시 찬찬히 냉장고 안을 훑어봤다. 음료수 칸도, 야채 칸도, 심지어 냉동실도 확인했다. 없다.

“설마, 내가 어제 술김에 다 마셨나?”

그럴 리가. 나는 주량이 약해서 두 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게다가 어제는 평범한 평일 저녁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갑자기 온몸의 피로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맥주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절망적일 줄이야.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다. 어제 벗어 던진 재킷이 소파 팔걸이에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옷걸이도 아니고, 팔걸이였다. 분명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는데.
“어, 내가 이걸 이렇게 놨었나?”
멍하게 재킷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잠결에 정리했는지도 모르지. 워낙 깔끔 떠는 성격이니까.

회사에 가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 입었던 바지를 빨래통에 넣고, 새 바지를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그런데 서랍 속이 난장판이었다. 차곡차곡 개어 넣어둔 바지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어떤 바지는 아예 뒤집혀서 처박혀 있었고, 어떤 것은 구깃구깃하게 뭉쳐져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나는 평소 옷 정리도 칼같이 하는 편이었다. 누가 봐도 완벽주의자라고 할 만큼. 이런 식으로 흐트러져 있는 옷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내가 어제 도대체 뭘 한 거지?”
혼란스러웠다. 어제 뭔가에 취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설마 몽유병이라도 생긴 건가? 불안한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몽유병 증상’을 검색했다. 옷을 어지럽히는 증상은 없었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오니 더 기이한 일들이 벌어져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내가 몇 주 전 읽다 만 소설책이 활짝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며칠 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머리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머리핀은 분명 화장실 어딘가에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는데.
“뭐야, 나 치매인가?”
이제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 명확히 잘못되고 있었다.

그 다음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리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때였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내 커피잔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듯이, 오른쪽으로 스르륵 밀려났다.

“헙!”

놀란 나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 커피잔은 이내 멈췄지만,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거…”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영화에서나 보던 폴터가이스트? 귀신? 설마. 말도 안 돼. 21세기, 서울 한복판 오피스텔에서 귀신이라니!

그날 이후, 기괴한 현상들은 더욱 대담해졌다.

냉장고 문이 밤중에 혼자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리모컨은 늘 기상천외한 곳에서 발견됐다. 한 번은 냉장고에 넣어둔 간장병 안에 있었고, 다른 한 번은 세탁기 문틈에 끼어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 변기가 밤새도록 혼자 물을 내리는 통에 수도세 폭탄을 맞을 뻔도 했다.

“젠장! 누가 내 물을 이렇게 펑펑 쓰는 거야!”
나는 이성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며칠 밤낮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혹시 누가 내 집에 몰래 들어오는 건 아닐까 해서 CCTV까지 달아볼까 했지만, 비싼 설치비에 엄두를 못 냈다. 게다가 침입자가 저렇게 맥주나 훔쳐 마시고, 옷이나 어지럽히고, 변기 물이나 내린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드디어 이 미스터리의 범인을 잡기로 결심했다. 거실에 앉아 밤새도록 감시하기로 했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봤다. 밤 12시, 1시, 2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품이 터져 나왔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던 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가는 건가?

‘차라리 귀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퇴마사라도 부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새벽 3시 30분. 꾸벅꾸벅 졸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스툴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악!!!!!”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스툴은 공중에 20센티미터쯤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잡았다. 112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아니면 119? 아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데? ‘저희 집 가구가 혼자 공중부양했어요’라고? 정신병원으로 직행할 게 뻔했다.

그때였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벽에 걸린 액자였다.
내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는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거꾸로 걸려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수평을 맞춰서.

“이건… 이건 아니잖아…”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섭기보다는 화가 났다. 내 아늑한 공간을 이렇게 유린당하다니. 내 평화로운 삶을 이렇게 파괴하다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왜 이러냐고!!!”

흐느끼던 내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정확히 내 코앞에서, 누군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흐흐…”

귀청을 때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 분명 내 바로 앞에서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나는 온몸을 잔뜩 움츠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너… 너 누구야…!”
겨우 입을 뗀 순간,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말 걸어주네.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내 눈앞의 공기가 일렁였다. 마치 투명한 막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리고 그 일렁임 속에서, 한 남자의 형체가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를 ‘망령’이라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유령’이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는, 그저… 잘생긴 사람이었다.
너무 잘생겨서 비현실적일 정도의, 이 시대의 잘생김을 다 때려 박은 듯한, 그야말로 ‘사기캐’ 비주얼의 남자.

그는 여전히 키득거리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평생 본 어떤 공포 영화 속 귀신보다도 비현실적으로.
심지어 그가 입은 옷은 내가 어제 냉장고에서 찾지 못했던 내 맥주를 연상시키는 맥주색 티셔츠였다.
아니, 저 맥주색 티셔츠, 아무리 봐도 내 티셔츠잖아?

“어이구, 그렇게 예쁜 얼굴로 울지 마. 얼룩지잖아.”

남자가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허공을 휘저었다.
그의 손이 내 얼굴에 닿는 대신, 내 눈앞에서 흐물흐물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서는… 내 뺨을 톡톡 건드렸다.
차가웠다. 얼음장 같았다.

“너… 너 대체 뭐야?”
나는 이제 울음을 뚝 그치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글쎄? 네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네 집의 숨겨진 보물? 아니면 네 아파트의 가장 큰 민폐 동거인?”

나는 경악했다.
민폐 동거인? 내가 잃어버렸던 맥주는 설마 저 자식이…
내 옷은 저 자식이 맘대로 입고…
변기 물도 저 자식이 내렸단 말인가?

“너… 너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로 죽을 뻔했어!”
내가 이를 갈자, 그는 더욱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응, 그거 딱 내 목표였는데.”
그의 미소는 너무나 천진난만했고, 너무나 얄미웠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내 평화로운 삶은, 이 잘생긴 ‘민폐 동거인’과 함께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_1화 끝\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