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을 감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현실의 지루한 방구석에서 나의 육신은 축 늘어져 있었지만, 의식은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마에 감긴 쿨링 밴드의 서늘한 감각과 귀를 덮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명상적인 음악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트러트렸다.
“에테르나(Aeterna)에 접속하시겠습니까?”
고요한 기계음이 정신의 심연에 울려 퍼졌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현실의 강태민은 빚에 시달리고, 취업 준비에 지쳐가는 평범한 20대였지만, 이곳 에테르나에서는 달랐다. 적어도, 다를 수 있었다.
“예.”
나직이 답하자, 온몸을 감싸는 듯한 부유감이 찾아왔다. 검은 허공은 순식간에 수억 개의 빛나는 별들로 채워졌고, 이내 그 별들은 빠르게 한 점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문을 형성했다. 문이 열리자, 찬란한 빛과 함께 온몸을 휘감는 바람이 느껴졌다.
나의 가상 육체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름은 ‘카인’. 튜토리얼을 건너뛰고 바로 본 게임으로 진입하는 옵션을 선택했기에, 나는 익숙한 시작 지점에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언제 봐도 경이로웠다. ‘에메랄드 숲’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키 큰 나무들의 잎사귀는 투명한 에메랄드 보석처럼 햇살을 머금고 있었고, 땅에는 신비로운 빛을 내는 이끼와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했다. 공기 중에는 옅은 마나의 기운이 안개처럼 떠다니며 후각을 자극했고, 머리 위로는 정령들이 작은 빛의 구슬이 되어 유영했다.
나는 게임 내 캐릭터 정보창을 열었다.
**[캐릭터 정보]**
이름: 카인
종족: 인간
직업: 정령사
레벨: 1
소속: (없음)
칭호: (없음)
스탯:
힘: 5
민첩: 7
체력: 6
지능: 10
정신: 12 (특화)
운: 5
기술:
– 초급 정령 감응 (패시브): 주변 정령의 기운을 감지합니다.
– 정령의 속삭임 (액티브): 낮은 단계의 정령과 교감하여 주변 정보를 얻습니다.
– 미약한 치유의 손길 (액티브): 작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쿨타임 30초)
정령사는 에테르나에서 그리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 공격 능력은 미약하고, 회복 능력은 한정적이며, 전투 보조 역할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령사가 좋았다. 자연과 교감하고, 세상의 숨겨진 면모를 알아가는 과정이 현실의 삭막함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자, 이제 뭘 해볼까.”
나는 허리춤에 찬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초보자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물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첫 퀘스트라도 받아야 할 터였다. 멀리 보이는 에메랄드 숲의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낡은 나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퀘스트: 숲의 이슬꽃을 모아 오세요 (초급)]**
에메랄드 숲에 서식하는 희귀한 약초인 ‘숲의 이슬꽃’ 10개를 모아 ‘숲의 요정 아멜리아’에게 전달하세요.
보상: 경험치 50, 에테르 코인 10, 하급 체력 포션 3개.
단순한 채집 퀘스트였다. 에테르나의 초반 퀘스트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나는 지도에 표시된 이슬꽃의 위치를 확인하고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어디 보자… 이쪽인가.”
숲은 햇살이 잘 드는 곳과 그늘진 곳이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이슬꽃은 주로 습하고 그늘진 곳에 핀다고 했다. 나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초급 정령 감응’ 패시브 덕분인지, 주변의 미약한 정령들의 움직임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가자, 이내 한 무리의 이슬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꽃잎에 새벽 이슬이 맺혀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조심스럽게 꽃 10개를 채집하여 자루에 넣었다.
퀘스트를 완료하러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크르르르…”
낮게 울리는 짐승의 소리. 심상치 않은 기운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초급 정령 감응’이 경고하듯 격렬하게 반응했다. 주변의 정령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숲의 가장 깊은 곳,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음습한 골짜기였다. 그곳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어둠으로 뒤덮인 늑대 형상의 그림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림자 늑대’. 에메랄드 숲의 하급 몬스터이긴 했지만, 그 수가 많으면 초보자에게는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늑대들이 아니었다.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한 존재였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피부색은 달빛처럼 창백했고, 은회색 머리카락은 짙은 숲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가는 팔다리에는 검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이마에는 작은 뿔이 살짝 솟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깊은 밤하늘처럼 검푸른 눈동자에는 별빛 같은 푸른 점들이 박혀 있었고, 그 눈동자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엘드리치’였다.
에테르나에서 엘드리치는 ‘어둠의 종족’, ‘재앙을 부르는 자들’로 불리며 인간들에게 멸시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종족이었다. 그들과 교류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녀는 그저 홀로 그림자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통받는 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녀의 한쪽 어깨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은 듯, 움직임이 둔해 보였다. 그림자 늑대들은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섰다.
“크아앙!”
한 마리가 먼저 달려들었다. 엘드리치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그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또 다른 늑대가 그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젠장…!”
직업은 정령사. 공격 스킬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무언가라도 해야 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정령의 속삭임!”
주변의 미약한 바람 정령들이 나의 의지에 반응하여 작게 소용돌이쳤다. 거대한 힘은 아니었지만, 늑대들을 잠시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크르륵?”
갑작스러운 기류 변화에 늑대들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짧은 순간, 엘드리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 경계심 가득한, 그러나 동시에 깊은 의문을 담은 시선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희미한 놀라움을 읽었다. 인간이 자신을 도왔다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일까. 아니면, 이 미약한 정령의 힘에 대한 의아함일까.
그림자 늑대들은 이내 나를 발견했다. 녀석들의 붉은 눈이 내게로 향했다.
“끼아아앙!”
한 무리의 늑대들이 나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나는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다.
그때였다.
“물러서.”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 마치 얼음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듣는 이를 압도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엘드리치였다.
그녀의 손에서 검푸른 빛이 솟아올랐다. 흐릿한 어둠의 기운이 빛과 함께 뒤섞여 그녀의 몸을 감쌌고, 이내 그녀의 손끝에서 뾰족한 얼음 송곳들이 형성되었다.
“감히 나의 사냥터를 침범하다니.”
엘드리치는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빛나는 얼음 송곳들이 그림자 늑대들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콰쾅! 콰쾅!*
두어 마리의 늑대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머지 늑대들도 예상치 못한 강력한 공격에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마력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방금 전의 공격이 그녀의 상처에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더 솟구쳤다.
쓰러진 늑대들의 그림자는 서서히 숲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나머지 늑대들도 눈치 빠르게 꼬리를 내리고 도망쳤다.
이제 숲 속에는 나와 그녀만이 남았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경계심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 체념은 없었다. 대신, 깊은 호기심과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의 미숙한 손길로 바람 정령들을 불러냈던 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이내 다시 나의 눈을 응시했다.
“인간… 네가…”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엘드리치에게 도움을 받았고, 동시에 그녀를 도왔다. 금기시된 접촉.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내게… 왜 그리 했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 별빛들이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는 듯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인간.”
그녀의 질문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카인…”
그녀는 내 이름을 되뇌듯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상처 입은 어깨를 부여잡은 채였다.
“고마워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널 이곳에 버려둬야 할까.”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손끝이 나의 볼에 닿으려다 멈칫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종족: 엘드리치와 과도한 교류 시, 특정 세력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 행동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경고 메시지에 당황했지만, 그보다 그녀의 눈빛에 갇혀 있었다.
금기된 존재와의 첫 만남.
이것이 내가 에테르나에서 찾던, 지루한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모든 것을 뒤흔들 운명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손이 나의 볼에 닿을 듯 말 듯한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켰다.
차갑고, 부드러운. 그리고 미지의 접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