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피와 흙의 서막
북풍이 휩쓸고 간 지 오래인 흙먼지골에도 지독한 여름이 찾아왔다. 끓어오르는 대지는 쩍쩍 갈라져 허연 입을 벌렸고, 그 메마른 입새로 희망 대신 먼지만 뿜어냈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려 발버둥 쳤다. 천하제국이 지배하는 광대한 대륙의 변방, 이곳 흙먼지골 주민들에게는 제국의 위대함이나 황제의 덕이라는 말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들의 현실은 매년 늘어나는 세금과 끝없이 이어지는 부역, 그리고 굶주림이었다.
흙먼지골의 유일한 우물가에는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물을 긷기 위함이 아니었다. 땀에 절은 몸으로 하루 종일 밭을 매거나 나무를 하던 사내들은 축 늘어진 어깨로 웅성거렸고, 앙상한 팔로 아이를 안은 여인들은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살폈다. 며칠 후면 제국의 조세관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씨앗마저 다 털어갈 게 분명해.”
툭 던지듯 내뱉는 김 노인의 말에 깊은 한숨이 우물가에 퍼졌다. 김 노인은 흙먼지골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자,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허리띠에는 굶주림에 죽어간 자식들의 작은 신발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분노 대신 체념만이 가득했다.
“그럼 우리는 뭘 먹고살아요, 노인장?”
갓 스무 살이 넘었을까 싶은 젊은 어미가 젖도 나오지 않는 가슴을 움켜쥐며 흐느꼈다. 품 안의 아이는 이미 눈물조차 메말랐는지, 창백한 얼굴로 쌔근거릴 뿐이었다. 그 처량한 모습에 모두 고개를 돌렸지만, 마음속으로는 제 부모, 제 자식의 모습이 겹쳐 보여 견딜 수 없었다.
강휘는 그런 풍경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큼지막한 망치로 쇠를 두드려 농기구를 만드는 것이 그의 업이었다. 투박하지만 단단한 손은 평생 흙과 쇠를 만져온 흔적이었다. 그의 등은 여느 사내들처럼 굽어 있지 않았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우물가로 향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체념 끝에 내쉬는 한숨이나, 어린 어미의 애끓는 울음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지난겨울,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제 동생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제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왜 모든 것을 가져가려는 걸까?”
나지막이 읊조리는 강휘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 불꽃은 이내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 다시 꺼지는 듯했다. 무력감, 그것은 이 땅의 모든 평민이 짊어진 굴레였다.
사흘 뒤, 예상대로 조세관 일행이 흙먼지골에 당도했다. 흙먼지골이라 불리는 이 작은 마을조차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제국의 일부였다. 그들은 수십 명의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 병사들의 검은 철갑은 흙먼지골의 해묵은 평화에 난폭한 균열을 냈다. 그 선봉에는 마치 제국의 비대한 탐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내, 감찰관 나대길이 서 있었다. 비단옷은 기름기로 번들거렸고, 그의 얼굴에는 흙먼지골 사람들을 향한 노골적인 경멸이 가득했다.
“이 천하제국의 변방에서 게으름 피울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황제의 은혜로 살아가면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는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대길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을 전체를 울렸다. 그는 마치 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수레에 실어온, 겨우 한 끼 죽이라도 끓일 수 있을까 싶은 곡식 자루들을 그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들의 눈은 이미 삶의 의지를 잃은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다냐? 작년보다도 못하구나! 이 버러지 같은 것들!”
나대길은 퉁퉁한 발로 곡식 자루를 걷어찼다. 흙바닥에 뿌려지는 귀한 곡식들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움찔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병사들의 날카로운 검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기 때문이다.
“가뭄으로 수확이 형편없었습니다, 감찰관 나으리.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것마저 빼앗아가시면 우리는 정말 굶어 죽습니다.”
김 노인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나대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체념이 아닌 절박함이 묻어났다.
“자비? 네놈들 따위에게 자비는 사치다! 황제 폐하의 대업을 위해 너희들의 피와 땀은 기꺼이 바쳐져야 할 것이니라!”
나대길은 김 노인을 발로 걷어차며 악을 썼다. 늙은 노인은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겨우내 아끼던 작은 엽전 꾸러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 품에 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어미가 뛰쳐나왔다.
“이 돈은 안 됩니다! 이 돈은… 제 아이가 며칠 전부터 열이 끓어 겨우 모은 약값이었습니다!”
어미는 나대길의 발밑에 엎드려 바닥에 떨어진 엽전 꾸러미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려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제 한 몸을 던져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동물과 같았다.
“건방진 계집 같으니!”
나대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미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힘없이 딸려 올라간 여인은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 아이의 목에서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아이가 쓰러지면서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다. 핏물이 검은 흙 위로 작은 꽃잎처럼 번져 나갔다.
“안 돼! 내 아이!”
어미의 절규가 흙먼지골에 메아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경악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병사들은 냉혹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만하시오.”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강휘였다. 그는 망치를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붉게 물든 노을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의 눈은 불타는 숯불처럼 이글거렸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언가 단단한 결의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이놈은 또 누구냐? 감히 황제의 명을 집행하는 자에게 대드느냐!”
나대길이 강휘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병사 두 명이 이미 검을 빼 들고 강휘를 향해 다가섰다.
“황제의 명이 아니라, 당신의 탐욕이다. 당신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 이제 더는 줄 것이 없어! 심지어 이 아이의 목숨까지도!”
강휘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꺾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흙먼지골 사람들은 숨죽여 그들을 지켜봤다. 저 무모한 사내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이런 반역자 같은 놈을 보았나!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 효수하라!”
나대길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병사들이 강휘를 향해 돌진했다. 첫 번째 병사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강휘는 빠르게 몸을 숙여 칼날을 피하고는,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러 병사의 복부를 가격했다. 묵직한 둔탁음과 함께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두 번째 병사가 놀라 잠시 주춤한 사이, 강휘는 쓰러진 병사의 손에서 검을 낚아챘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흙먼지골의 노을빛을 받아 핏빛으로 빛났다.
강휘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굳건히 서서, 무수히 많은 병사들과 오만방자한 나대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뒤에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아이와 절규하는 어미,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강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속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격렬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흙먼지골의 모든 주민들은 알 수 있었다.
이제, 피가 뿌려질 차례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