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유리잔이 춤추는 아파트**

고요한 밤, 도시의 불빛은 항상 깨어 있었다. 유나는 제법 익숙해진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베란다 창문을 타고 스며드는 여름밤의 습한 공기가 살짝 답답했지만, 오늘 밤은 평소와 다른 기운이 그녀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심플한 팔찌가 희미하게 진동하며, 작은 알림음 대신 따뜻한 온기를 전해왔다.

“모모, 뭐야?”

유나가 팔찌를 톡톡 두드리자, 팔찌의 중심에 박혀있던 수정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공중에서 형상을 이루었다. 보송보송한 털에 커다란 눈, 고양이 같으면서도 요정 같은 이 작은 생명체는 유나의 오랜 파트너, 모모였다.

“음냐… 콜록! 갑작스러운 기운이야, 유나!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어!”

모모는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품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허공을 킁킁거렸다.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고? 어떤 기운인데?”

“혼란스러워! 슬픔과 분노, 절망이 뒤엉킨 에너지인데… 희한하게 물질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마치… 마치 살아있는 감정의 폭풍 같달까!”

모모의 말에 유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아있는 감정의 폭풍. 그것은 보통 마법소녀의 손길이 닿기 전의, 초기 단계의 악몽 같은 존재들이 흔히 보이던 특성이었다. 하지만 물질계에 직접적인 영향이라니.

“위치는?”

“어…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약 3.7킬로미터. 스무 층짜리 아파트 건물이야. 제일 높은 층, 2004호에서 감지되고 있어.”

모모의 보고에 유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야상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임무를 앞둔 전사의 그것이었다.

밤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아파트 단지는 여느 도시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조경, 늦은 시간에도 몇몇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유나는 20층의 2004호를 올려다보자마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집들과 달리 그곳의 불빛은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듯했다.

딩동.

벨을 누르자 한참 뒤에야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여자는 초췌한 얼굴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머리를 대충 묶은 채 잠옷 차림이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택배 착오로 온 건이 있어서 확인차 잠시 들렀습니다.”

유나는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 마법소녀라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택배요? 저는 시킨 게 없는데…”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나를 보았지만, 이내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들어오세요. 어차피 이 꼴을 누가 보겠다고…”

그녀는 문을 완전히 열며 뒤돌아섰다. 유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묘한 냉기를 느꼈다. 한여름 밤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이 좀 지저분하죠? 죄송해요. 요즘 통… 기운이 없어서.”

여자의 이름은 서진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읽다 만 잡지들과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유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테이블 위,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아야 할 공간에 놓여 있는 유리잔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잔을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모는 유나의 어깨에 살짝 내려앉아 귓속말로 속삭였다.

“유나, 느껴져? 감정의 파동이 이 공간을 뒤덮고 있어. 모든 물체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다고!”

유나는 서진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혹시 요즘 이상한 일 없으셨어요?”

유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이상한 일이요? 매일이 이상한데요. 잠도 못 자고, 물건은 저절로 떨어지고, 갑자기 불이 꺼지거나 켜지고… 제가 미쳐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던 유리잔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리잔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꺄악!”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나는 재빨리 그녀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으세요?”

“이… 이건 또 뭐야! 또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서진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절망적인 감정이 공간을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반응하듯,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삐뚤어지고, 책장의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천장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더니 결국 ‘팟!’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암흑 속에서, 서진의 흐느낌만이 적막을 갈랐다. 유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평범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서진의 내면에 갇힌 깊은 절망이, 이 공간에 유령 같은 형태로 발현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유나, 이건 강력한 감정의 덩어리야!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았지만, 그 어떤 괴물보다도 위험해질 수 있어!”

모모의 목소리가 유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알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의 물건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거실 중앙의 커다란 장식장이 기울어지더니, 곧 바닥으로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뒤편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서진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 순간, 날아오던 유리병 하나가 유나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파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팔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

유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공중에 떠 있던 물건들이 일순 멈칫하는 듯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싸던 절망의 기운이 잠시 물러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당신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어. 당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내가 멈출게.”

유나는 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모모, 준비해.”

“알았어, 유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서둘러야 해!”

유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에 갇힌 절망을 정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근원을 마주하기 위해. 이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주변의 물건들이 다시금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나는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이 밤, 유리잔이 춤추는 아파트에 별빛 마법소녀의 노래가 울려 퍼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