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김민준은 새로 이사 온 아파트 1203호가 마음에 쏙 들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은 화려했고, 모든 것이 최첨단 자동화 시스템으로 연결된 이 공간은 미래 그 자체였다. 그는 이 도시의 핵심, 번화가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작은 성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첫날 밤, 거실의 스탠드 불빛이 한번 깜빡였다.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새 아파트인데도 가끔 이러네. 전기 불안정인가.”

둘째 날, 잠들기 전 침대 맡에 두었던 휴대폰 충전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발로 찼나?” 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셋째 날 밤, 자다가 목이 말라 일어났다. 주방으로 가려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리모컨이 소파 아래로 반쯤 밀려나 있었다. 심지어 거실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그는 분명히 잠그고 잤는데.

“착각이겠지.” 민준은 애써 웃으며 리모컨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왠지 모를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창밖의 도시 야경은 여전히 번쩍였지만, 그 빛이 이제는 어딘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 주 내내 이상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아침마다 컵이 싱크대에서 거실 테이블로 옮겨져 있거나, 분명히 걸어두었던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민준은 스마트폰으로 집안 곳곳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과로와 스트레스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카메라에 포착된 건 없었다. 오직 혼자 움직이는 물건들의 잔상뿐.

“민준아,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헬쓱한데.” 직장 동료 지혜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그냥 새 아파트가 좀… 적응이 안 돼서.” 민준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차마 ‘내 집에서 물건들이 저절로 움직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당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날 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소파에 쓰러졌다. 갑자기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게 대체 뭐야!” 민준은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누군가 분명히 던진 것 같은 격렬함이었다. 하지만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때, TV가 저절로 켜졌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송출되지 않고, 오직 지직거리는 노이즈만이 가득했다. 노이즈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서 외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돌아…와…’

민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급하게 인터넷 검색창에 ‘아파트 폴터가이스트’라고 입력했다. 수많은 기사와 블로그 게시물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은 ‘오래된 건물에서 발생하는 가스 누출 현상’이나 ‘심리적 착각’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중 한 카페 게시글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목은 ‘도시 영류 현상에 대한 고찰 (비주류 이론)’.

“오래된 이론입니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급진적인 도시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던 바가 있죠. 특정 지역에 대규모 구조물이 들어서고 지하 터파기 작업이 진행될 때, 지면에 흐르는 자연적인 ‘영류(靈流)’가 교란되어 미세한 ‘공간 균열’을 일으킨다는 설입니다. 이 균열은 현실과 다른 차원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일시적인 물리적 간섭 현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죠. 당시 주류 과학계는 이를 미신으로 치부했고, 국가적 차원의 근대화가 우선이었던 시기라 철저히 묻혔습니다. 모든 이상 현상은 과학적 설명으로 대체되었고, 이 ‘영류’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간혹 보고되는 기괴한 사건들을 보면, 마냥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민준의 등골에 다시 한 번 한기가 스쳤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가 있는 지역을 떠올렸다. 이 일대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산과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위에 콘크리트와 철골을 박아 넣고, 지하 깊숙이까지 파헤쳐 지금의 번화가를 만들었다. 다른 차원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것. 어쩌면 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다른 현실의 단편이 현재를 침범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도시의 급성장이 남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그 순간, 그의 침실 문이 활짝 열렸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나왔다. 그는 침실 안쪽, 어둠 속에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인간과 비슷한 윤곽.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민준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민준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다른 차원의 경계’. 그의 머릿속에 그 문구가 맴돌았다.
“넌… 누구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둠 속의 형체가 아주 천천히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바닥에 깔린 카펫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툭…’ 마치 습한 동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 물방울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툭… 투둑… 투두둑!’

어둠 속의 형체는 이제 민준의 시선으로도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흐물거리는 점액질의 덩어리 같기도 했고, 이끼 낀 돌덩이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덩어리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칙칙하고 탁한 녹색 빛이.

‘여긴… 우리가 살던 곳이잖아.’ 노이즈 속에서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외치는 듯했다. 고통스럽고, 분노에 찬 목소리들.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녹색 빛을 뿜는 그 덩어리가 서서히 침실 문턱을 넘어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덩어리가 지나간 바닥에는 검은 자국이 남았다. 축축하고, 역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민준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 거대한 녹색 덩어리가 지나는 모든 곳에서 전등이 깜빡이고, 가구들이 삐걱거렸다. 테이블 위의 물컵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산산조각 났다.

민준은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거대한 도시의 심장부, 첨단 문명의 상징인 이 아파트에서, 그는 문득 자신이 가장 깊고 어두운 고대에 놓여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제발….” 그는 애원하듯 속삭였다.

녹색 덩어리가 민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속에서 수많은 눈 같은 것들이 민준을 응시했다. 그것은 더 이상 비정형적인 덩어리가 아니었다. 이끼 낀 나뭇가지들이 뒤엉키고, 축축한 흙이 달라붙은, 살아있는 듯한 거대한 형상이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지어진 땅의 기억, 억압된 자연의 분노 그 자체였다.

그 거대한 형체가 민준에게 손을 뻗었다. 손이라기보다는, 녹색 이끼로 뒤덮인 굵은 뿌리 같은 것이었다. 그 뿌리가 민준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축축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빨아들이려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촉이었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녹색 빛이 가득 차올랐다. 거대한 도시의 야경은 사라지고, 오직 뿌리 뽑힌 땅의 절규만이 그의 귓가를 채웠다. 1203호, 이 첨단 문명의 아파트는 이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존재들에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들의 시공간 속으로 천천히 끌려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