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이 이 도시를 덮친 지 햇수로 3년째였다. 지훈은 창문 너머의 회색빛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썩어가는 건물들, 뼈대만 남은 다리들, 그리고 그 위를 끊임없이 휘도는 미세먼지와 죽음의 잔해들. 그래도 아파트는, 그의 12층 보금자리는 아직 견고했다. 최소한 물리적으로는 그랬다.
“오늘도 시체는 없군.”
혼잣말은 늘 공허했다. 지난 몇 년간,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이뿐이었다. 물을 아끼며 손을 씻고, 식어버린 통조림 수프를 스푼으로 떠먹고, 해가 지면 태양열 충전등을 켜고 낡은 책을 읽었다. 바깥은 지옥이었지만, 이 좁은 공간은 그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컵.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손에 힘이 빠졌겠지. 혹은 지진이라도 있었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파편들을 주우며 중얼거렸다.
며칠 후였다. 읽던 책이 침대 옆 협탁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번엔 깨진 유리 파편이 아니었으니, 별 생각 없이 주워 올렸다. 잠결에 발로 찼거나, 고양이 한 마리라도 들어왔을 리 없다는 확신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도시에는 고양이도, 개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생명이란 지훈 자신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미묘한 어긋남들. 화장실 문이 닫혀 있었는데 열려 있다거나, 분명 잠갔던 현관문이 삐걱거린다거나. 처음에는 자신의 착각이라고 믿었다.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리라. 고독이 주는 환상일 수도 있었다. 그는 애써 무시했지만, 내면의 불안감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느 날 밤, 잠을 자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히 보았다. 침대 발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그림자? 아니,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저 흐릿하고, 잡을 수 없는 형태였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찢어지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굳어버렸다.
“누구… 야?”
겨우 나온 소리는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 같았다. 답은 없었다. 다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부엌에서 요리 도구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부서진 가구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원인을 찾았다. 바람? 노후된 건물? 쥐? 하지만 그의 아파트는 너무나 고요했고,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 나와! 제발….”
그는 벽에 대고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대신, 식탁 위 유리컵이 덜커덩거렸다. 한순간, 컵이 공중에 붕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산산조각이 났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그는 숨을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공기 중에 냉기가 맴돌았다. 눈앞에서 그의 유일한 낙인 책들이 서가에서 한두 권씩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한 권, 또 한 권.
“왜… 왜 이러는 거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침실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려 했으나, 문고리가 그의 손에 닿기도 전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잠겼다. 쿵, 쿵, 쿵. 문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것이 문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나가… 나가라고!”
그는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어둠 속에서, 벽장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언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존재가 숨죽이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너… 넌 뭐야? 나 혼자야. 이젠 아무도 없어….”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순간, 벽장 안에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는 듯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그리고 흐릿한 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이는 듯했지만, 동시에 수천 명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울림이었다.
— *혼자… 가 아니… 야…*
그 소리는 뇌를 직접 울리는 듯했다. 지훈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환청인가?
그때, 침대 옆 협탁 위의 스탠드가 덜컥거리더니 혼자 켜졌다. 그리고는 깜빡였다. 한번, 두 번, 세 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 * *
지훈은 며칠 밤낮을 잠들지 못했다. 아파트 안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컵이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의 유일한 위로였던 책들은 너덜너덜해졌다. 마치 아파트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이 불안해하면, 그것은 더 격렬해졌다. 지훈이 혼잣말로 울부짖으면, 그것은 기이한 속삭임으로 답했다.
어느 날 아침, 지훈은 거실 한가운데 널브러진 책들을 주워 올리다 얼어붙었다. 책들이 흩뿌려진 모양새가 단순한 무작위가 아니었다. 마치 글자처럼 보였다. 수없이 많은 책들 중에서 무작위로 뽑힌 단어들이, 바닥에 뒹굴며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 * *
「…여기… 남겨… 졌어…」
* * *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소름이 온몸을 뒤덮었다. 누군가 남긴 메시지인가? 아니면 이것이, 이 존재 자체가 남겨진 것인가?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의 책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손이 닿자, 그 메시지를 이루던 책 한 권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그 페이지에는 불길한 삽화와 함께 ‘멸망’이라는 단어가 붉게 그려져 있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동시에 집 안의 모든 창문이 쾅! 하고 일제히 열렸다. 바깥의 잿빛 먼지가 한순간에 아파트를 덮쳤다. 거세게 불어닥치는 바람 속에서, 그는 창문 너머의 도시를 보았다. 텅 비어버린 거리, 부서진 건물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은 암울한 구름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아파트 안에 갇힌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이 도시 전체의 절규, 사라진 모든 생명들의 기억, 재앙이 남긴 고통의 잔재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기이한 폴터가이스트는 혼자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의 파편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도시 그 자체의 슬픈 비명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남겨졌다’.
창문이 다시 쾅! 하고 닫혔다. 먼지는 가라앉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고요였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섬뜩하고 존재론적인 고요.
지훈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 아파트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무덤이자, 살아있는 기억의 감옥이었다. 그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혼자 버텨왔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수많은 영혼들이, 그 도시의 비명이 그와 함께 이곳에 갇혀있었다.
그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잠겨있던 문은 스르륵 열렸다. 바깥의 어둠과 폐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 것인가, 아니면 이 아파트에 남겨진 망자들과 영원히 공존할 것인가. 그의 선택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미쳐버린 세상의 슬픈 메아리 속에서, 그의 정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었다.
지훈은 문턱에 서서, 천천히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뒤로 현관문이 삐걱거리며 다시 닫혔다. 그 안에서, 흩어진 책들 사이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무수한 눈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